한국일보

미국, 정신차리라

2002-12-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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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이는 북한의 비밀스런 우라늄 농축프로그램이나 오는 19일 있을 한국 대선 때문이 아니라 한국과의 관계를 잘못 다룬 주한미군 때문이다. 오랜 우방인 한국에서 점증하는 반미는 일상적인 동맹관계를 껄끄럽게 할 뿐 아니라, 한국인의 눈에 미군이 한국을 점령한 마지막 외국군으로 비쳐지게 하고 있다.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고 한미 양국의 다방면에 걸친 협력관계를 감안할 때 한미관계가 당장 위험한 상태로 빠져들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가 미국과의 관계보다 더욱 쓸모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될지 모른다. 지난 일요일 약 1만5,000명이 반미시위를 벌였다. 이는 근자에 들어 최대 인파였다.
현 상황은 2년 전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과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미국이 남북화해 노력을 좌초시키려 한다는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한미관계가 금이 가게 된 것은 한국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사건 이후다. 구불구불한 길에서 훈련중인 미군 장갑차가 여중생 둘을 친 것은 분명하다. 현존하는 그러나 구식의 한미협정에 따르면 훈련 중 발생한 사고는 미군 법정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도록 돼 있다. 사고를 낸 두 병사는 무죄평결을 받았다. 이들의 상사는 재판을 받지 않았다. 만일 재판을 받았더라면 죄가 인정됐을 것이다.
수개월이 지나서야 부시는 한국인들에게 유감을 표명한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때늦은 그리고 형식적인 제스처로는 한국인, 언론, 정부에까지 퍼진 분노를 경감시킬 수 없었다. 미군에 대한 재판 결과가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고는 발생했고 2가지 사실이 드러났다. 하나는 사고에 관한 정보가 미군에게 불리하게 보였으며 다른 하나는 보다 많은 정보가 조금씩 공개됐다는 점이다.
이 같은 일 처리는 한미동맹 법규와 관련해 새로운 선례를 남길 것을 우려한 국방부 변호사들과 장기적인 동맹관계를 생각하는 전략가들간의 대화가 부족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거만한 자세로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려던 것이 문제였다. 이 같은 태도는 강대국이 약소국에 보여준 전형적인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미국이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 해서 한국의 시민운동단체들을 촉발시켰고 반미 확산을 부채질했다. 이번 반미는 전쟁 이후 한국에서 발생한 움직임 가운데 가장 심각한 수위에 도달했다고 본다.
지난 2주간 한국 내 미군기지에서 벌어진 반미시위는 지난 80년대 미국을 한국에서 몰아내자는 과격한 이념운동과는 다르다. 작금의 반미는 교육수준이 높고 인터넷에 능숙한 민간조직과 시민그룹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광범위한 사회운동이란 점이다.
지난 80년대 반미의 상징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화염병을 투척한 과격 학생들이었지만 이번 반미의 상징은 가정주부 또는 은행원이다. 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미 동맹관계에 잠재적으로 더욱 위협적이다.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가 장갑차 사고와 같이 특정 이슈에서 비롯된 반미를 사회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고 위험한 이념적 반미로 탈바꿈하게 한다면 말이다.
이번 사고를 둘러싼 미국의 태도가 미치는 파장은 단순히 미군 주둔과 관련한 향후 협상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미국 상품을 내다 팔 시장이라는 점 외에도 민주적 제도, 미군기지, 막강한 군사력 등으로 미국에 전략적으로 지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미군이 개입된 비극적 사고는 항상 동맹관계를 저해한다. 다행하게도 끈끈한 유대관계에 힘입어 불편한 사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금 좋아지곤 했다. 하지만 사고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인정하고 사안을 말끔하게 처리한다면 양국관계는 훨씬 빨리 회복되게 마련이다.
빅터 차·마이클 오핼런
/LA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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