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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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무기가 아니다

2002-12-1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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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은데 어떻게 두만강을 건너왔니?” “굶어죽을 수 없었어요. 하루 3끼 굶었더니 강기슭에 도착해서는 힘이 없어 떠내려가는 줄 알았어요. 실제 물에 빠져 죽는 어린이들도 있어요”

연전에 한국의 방송국 프로듀서가 북한에 접경한 중국 도문의 한 공원에서 탈북 어린이와 나눈 대화이다. 이 어린이는 시장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한푼 두푼 모은다고 했다. 중국 돈으로 200백원이면 북한의 다섯 가족이 옥수수 죽으로 두 달간 연명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한 북한주민은 9살된 아들을 무등 태워 두만강을 넘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강가에 내려주고 “너는 이제 굶지 않을 것”이라면서 다시 강을 헤엄쳐 북한 땅으로 갔다. 이 어린이는 조선족이 키우고 있다고 한다. 한 북한 부부는 울며 아이를 요람에 넣어 물에 띄어 보냈다. 요람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멀리 강 건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조선족 부부는 “오죽 먹을 게 없었으면...”하고 말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함북 길주에 살던 한 여성은 7개월 된 딸을 땅에 묻었다. 분유나 우유는 생각할 수 없고 모유라도 줘야 하는데 먹은 게 없어 젖이 통 나오질 않아 아기가 시름시름 죽어갔다고 울먹였다. ‘통일강냉이보내기’ 모임의 자료집에 나오는 기막힌 내용들이다.

북한 어린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은 접하는 이들의 속을 훑어낸다. 북한정권은 미워도 천진무구한 어린이들까지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량사정이 괄목한 만한 개선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동안 대북 식량공급을 해 온 유엔세계식량기구가 끌탕을 하고 있다. 주요 기증국들의 지원이 부진해 내년 4월 식량공급을 중단할 수밖에 없어서다.

지난해는 640만 명을 도왔는데 올해엔 340만 명에게 식량을 주었을 뿐이고 내년 1월에는 다시 절반으로 지원규모를 줄여야 할 형편이라고 한다. 북한에 국제요원 50명과 현지고용인 60명, 평양 외 5개 도시에 사무소를 갖고 있는 유엔세계식량기구가 문을 닫으면 파장은 불 보듯 또렷하다.

유치원생들에게 점심을 제공해왔는데 이를 중단하면 어린 학생들이 추운 겨울을 더욱 춥게 나야 한다. 그렇다고 제대로 도시락을 싸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 말이다. 현재 유럽연합과 이탈리아가 내년에도 일정량의 식량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대북 최대 식량 지원국인 미국은 올해 세계식량기구의 지원물량의 3분의 1을 떠맡았다. 그러나 내년도 지원분에 대해서는 확답이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데 식량을 지원할 수 없다는 태도다. 부시행정부는 쌀을 ‘정치적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을 일축하면서도 북한이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언급해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식량이 굶는 주민들에게 전달되는 지 의심하는 미국이 이해는 간다. 그렇다고 핵 개발폐기나 완전한 식량사찰을 전제조건으로 내거는 것은 너무 사무적이다. 당장 끼니가 없어 보채는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라. 김정일 정권이 아무리 못마땅해도 일단 식량을 지원하고 정치적 사안은 사후협상을 통해 처리하는 게 ‘인간적’인 자세다.

미국으로서는 김정일 정권을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과 마찬가지로 ‘악의 축’으로 분류했으니 고분고분한 정권으로 교체하고 싶을 게다. 하지만 식량을 무기로 삼는 인상을 주어서는 곤란하다. 또 식량을 놓고 정치적 흥정을 한다고 해서 효과를 보장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미국이 주도한 유엔의 대 이라크 경제제재로 고통을 겪은 것은 후세인이 아니라 이라크 주민, 특히 어린이들이다.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부족으로 영양실조가 만연하고 질병치료가 안 돼 어린이 등 150만 명이 숨졌다고 한다.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세인을 단단히 벌주려 했지만 결국 후세인은 건재하고 주민들만 죽어갔으며 아울러 반미감정을 키웠다.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도 비슷한 맥락에서 봐야 한다. 식량지원을 중단한다고 해서 김정일 정권이 금새 붕괴할 것으로 기대한다면 순진한 계산이다. 북한 다루기는 순진한 주민들에 대한 식량지원과 별개로 다뤄야 한다. 북한주민들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는 것은 장기적인 투자다. 올 겨울이 문제다. 미국이 자랑해 온 ‘인도주의’에 흠집이 나지 않을까 염려된다.

박 봉 현 <편집위원>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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