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인종차별 정책에 항거하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넬슨 만델라는 27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노인이 되어 석방됐지만 복수 대신 화해 카드를 들고 나왔다. 인종차별제도 아래의 마지막 대통령인 데 클레르크의 사면에 의해 풀려난 만델라는 백인 정부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데 클레르크와 만델라는 백인과 흑인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살자는 데 합의해 350여년에 걸친 흑백 인종분규를 마무리했다. 데 클레르크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수구세력의 압력에 굴복했거나, 만델라가 ‘흑인 천하’를 외치는 과격파에 동조했더라면 남아공은 지금껏 유혈충돌로 하루를 맞고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두 지도자는 무리 없는 정권교체를 위해 손을 맞잡았다. 나라를 온전히 보전한다는 대의를 따랐다. 만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돼서도 백인에 대한 보복이나 차별정책을 구사하지 않았다. 만델라의 자서전 ‘Long Walk to Freedom’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도 역시 화해이다.
화해의 아름다움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 노무현과 정몽준 후보가 서로의 정치적 이견을 뒤로한 채 뭉쳤다. 반대파는 온갖 원색적인 표현으로 단일화 시도와 단일화를 비난했지만 상당수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 서로의 주장에 적지 않은 양보를 해서 이뤄냈다.
두 후보는 결과가 뻔한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하길 원치 않는, 소중한 표가 정확히 반영되길 바라는 유권자들의 뜻에 귀를 기울였다. 근소한 차로 단일화 승패가 갈렸지만 사전 약조한 대로 결과에 승복하는 자세도 화해의 한 징표라 하겠다.
‘화해의 미’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작은 한인사회이니 더욱 그러하다. 헌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진되고 있는 국민회관 복원사업이 복원위원회와 흥사단 미주위원부의 알력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복원위원회는 6명의 인사와 흥사단측 대표 1명, 건물 소유주인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측 대표 1명 등 8명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런데 흥사단측이 ‘1석’ 대신 ‘4석’을 요구하고 복원위측이 난색을 표명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숫자는 표면적인 것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흥사단측이 복원위 인선과정에서 배제됐다며 섭섭함을 공식 제기하면서 사안이 불거졌고 양측이 조금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아 감정대립 양상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민 100주년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타운의 어른들’이 왜들 이러는 지 모르겠다. 양측이 서로 옳다고 설전을 벌이는 동안 도산 선생은 하늘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억울한 옥살이로 쟁취할 것이 많은 만델라와 백인정권 수장으로서 지켜내야 할 것이 많은 데 클레르크도 대의를 위해 ‘작은 나’를 버렸다. 복원위와 흥사단 관계자들은 서로에게 양보한다고 해서 도대체 무엇을 잃는다고 그토록 화해를 못하는가. 좁은 마음으로는 진정한 복원사업이 불가능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고 앙금을 삭여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몽준 후보처럼, 지나치게 양보했다간 대권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던 걱정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국민회관을 복원한 뒤 “이 자랑스런 사업을 우리가 해냈다”고 어깨에 힘주고 싶어서 인가. 국민회관이 복원위와 흥사단의 ‘기 싸움 터’란 말인가.
평소 화해를 강조한 도산의 사진이 걸려 있는 방에서 화해를 깨치는 논의가 진행된다면 도산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복원위와 흥사단은 “복원사업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란 생각을 가져야 한다. 복원사업에서 유관단체들의 체면이나 위상은 중요하지 않다. ‘도산이 먼저’임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된다.
행여 복원사업을 빌미로 이름을 내거나 힘 자랑을 하려 한다면 자신들이 그토록 존경한다는 도산 선생을 욕되게 하는 처신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도산 선생에 대해 잘 모르는 2세들이 어른들의 싸우는 모습에 ‘도산’을 잘못 인식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박 봉 현 <편집위원>bongpark@korea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