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터널 속에 햇빛이

2002-11-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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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잠시 빛나는 순간, 세상은 그렇게 미친 곳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시리아를 포함한 15개 회원국 전체가 이라크에 대해 무제한적 무기 사찰을 촉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결의안에 손을 들었을 때, 나는 9.11 이후 처음으로 희망을 느꼈다.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나라, 대량살상무기를 내어놓으라는 유엔의 요구를 무시하는 나라는 가만 내버려 둘수는 없다는 지구 차원의 규범에 지구촌이 마침내 문화, 종교, 전략적 차이들을 모두 극복하고 합의한 것이다. 증오의 바이러스가 지구 전체에 퍼져있던지난 1년간 모든 사람은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우리는 뭔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유일한 수퍼파워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중요성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커졌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러시아, 중국은 미국의 막강한 힘을 규형잡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 그 힘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을 채널로 이끌어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부시팀 역시 자신들의 엄청난 힘을 합법화하는 것은 그 힘을 단순히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엔을 채널로 이끌어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 각국이 미국에 적대적이지 않으면서 미국의 힘에 균형을 잡으려면 유엔을 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역시 악의 축이라고 혼자 정의한 나라들에 대해 행동할 때 혼자 행동하기 보다는 유엔을 거칠 필요가 있다.
안보리가 없다면 우리는 힘을 적나라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프간의 경우와 같이 정당방위를 위한 전쟁이라면 그렇게 해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라크 케이스와 같이 선택에 의한 전쟁에서 미국민들은 적나라한 무력 사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강경 매파측에서는 부시대통령이 유엔을 통하는 것을 실수라고 불평한다. 사담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독자적으로 무력을 쓸 수가 없게 된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잘못된 것일뿐아니라 부시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럽국가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과 영국의 국민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불가피했다.
미국과 영국의 국민들은 이라크와의 전쟁을 선택에 의한 전쟁으로 본다. 전쟁이 정당한 선택이라 하더라도 유엔의 커버나 유엔 핵심 국가들의 지지없이 싸우는 것을 국민들은 원치 않고 있다. 이라크와 싸웠다 하면 장기 점령과 국가 재건이 불가피한데 이는 미국 혼자서 혹은 유엔만이 독자적으로 해서도 효과적으로 추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각 국가들이 이라크 무장해제 결의안에 찬성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가 있다. 몇몇 열강은 힘의 균형을 추구했고 시리아는 생명보험을 구입했다. 그러나 무기사찰 결의안을 실행에 옮기려면 각 국가들은 결의내용에 대해 정말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유엔에 가장 회의적이던 부시 행정부가 마침내는 그 기구에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해 가장 우려하던 국가들, 프랑스, 러시아, 중국 그리고 악의 축 리스트를 가까스로 면한 시리아가 미국의 위협, 혹은 미국의 무력 사용을 정당화 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토마스 프리드만
/뉴욕타임스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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