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민국‘인권침해’법적 대응으로 맞서야

2002-11-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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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권자 ‘마구잡이 구금’

테러방지 명목으로 장기간 수감은 부당
‘옛 과오=잠재적 위험’ 편견이 불안 초래
소수계 차별 소지 많아 시정 불가피

17년간 꼬박꼬박 세금을 낸 영주권자 P씨는 10월2일 사업차 한국방문을 마치고 LA공항에 내렸다가 봉변을 당했다. 이민국 직원이 과거에 체포됐던 기록이 있다며 2차 심사를 요구해 공항 내 이민국 사무실로 간 P씨는 한국여권, 영주권, 운전면허증을 빼앗겼다. 이민국 직원은 P씨를 7시간동안 기다리게 해 놓고 2시간동안 조사한 뒤 수갑채워 랭캐스터 교도소로 넘겼다.
창문 없는 감방에서 P씨는 새우잠을 자야 했고 당뇨로 고생한다고 애원해도 수감 2주가 돼서야 겨우 약을 받을 수 있었다. P씨의 과거 체포기록은 3건으로 1건은 무죄 확정됐고 다른 2건은 기소중지로 범죄기록은 아니다. 체포된 지 3주 만인 10월22일 검찰이 발급한 무혐의 기록을 제출하고서야 P씨는 풀려났다. 하지만 이번 일로 P씨는 당뇨가 더 악화됐고 마음의 상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 다른 영주권자 S씨는 10월3일 LA공항에서 수모를 겪었다. 입국심사에서 하자가 있다는 이민국 직원의 지적으로 랭캐스터 교도소로 넘겨졌다. 폭행사건으로 6개월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기록이 문제가 된 것이다. 변호사를 통해 단순폭행 사건임을 설득해 2주 만인 18일 귀가할 수 있었지만 그동안 당한 모멸감은 쉽게 지울 수 없을 게다.
한국서 돌아오다 LA공항에서 체포됐다 풀려난 J씨도 화를 삭이지 못한다. 9월19일 체포돼 40일간 잡혀 있다가 10월29일 자유를 찾았다. 발목이 부러져 목발을 집고 공항에 내렸고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수감 후 3주가 지나서야 약을 얻을 수 있었다. 2건의 경범죄 기록이 있지만 사회봉사형과 벌금으로 사안이 마무리됐는데, 이민국이 이를 확인하는 데 40일이 걸렸다는 점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J씨의 분노는 당연하다.
무역을 하는 K씨는 S씨와 똑같이 지난 91년 6개월 집행유예를 받은 기록 때문에 교도소에 수감됐다. 첫 아기를 임신한 아내가 남편의 느닷없는 체포에 충격 받아 입원했는데도, K씨는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10월16일 사업차 한국을 다녀오다 과거의 기록 때문에 LA공항에서 체포된 N씨도 지금껏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혀 있다.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인 수감자가 1명 더 있다고 한다. 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깜깜한 ‘고통의 터널’에 있다. 언제 석방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이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9.11 테러사건 이후 범죄 및 형사기록을 조회할 수 있는 종합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비시민권자에 대한 입국심사를 강화하며 체포 및 범죄기록이 있을 경우 현장에서 체포하고 구금하는 데서 이 같은 인권 유린사태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성실하게 납세하고 열심히 살아도 오래 전 기록으로 이 같은 봉변을 당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 이민전문 변호사의 지적대로 72시간 내 기소를 하지 않으면 석방을 해야 하는데 이를 어겼으니 인권을 침해한 공권력 남용이다. 그런데도 이민국은 행정상 착오라고 얼버무릴 뿐 뚜렷한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 피해 한인들의 법적 대응은 당연한 수순이다. ‘자유의 나라’니 ‘인권의 나라’니 자랑하면서 한편으론 소수계의 인권을 마구 밟고 있다.
만일 미국인이 외국에서 현행범도 아닌데 부당하게 구금된다면 미 정부는 온갖 요란을 떨 것이다. LA 총영사관이 발빠르게 움직여 이민국과 대화채널을 구축했고 불의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로 노력한다지만 실지로 이민국이 얼마나 협조적인 자세를 보일지 미지수다.
한미 양국의 특별한 관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외교적 쟁점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다.
이민국은 단순 경범죄보다는 중범죄 기록이 있는 사람을 조사대상으로 한다고 공언했다. 그 종류는 살인, 강간, 가정폭력, 매춘, 풍기문란, 아동 성폭행, 마약에서 사기, 절도, 공갈협박, 방화, 돈 세탁, 탈세까지 포함한다. 이들 범죄가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는 점은 맞다. 하지만 이들 범죄 행위에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를 구분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조사를 하려면 중범 기록이 있는 사람은 시민권 소지 여부에 관계없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
이민국은 국가안보를 위한 조치라며 주민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 있지만, 영주권자를 포함한 비시민권자는 잠재적 위험인물이란 도식적 사고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와 탈레반에 가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은 6명 중 5명이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 이다.
또 아프가니스탄에서 잡힌 ‘아메리칸 탈레반’ 존 워커도 시민권자다. 최근 워싱턴 DC 근교에서 공포를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무차별 저격사건 주범도 시민권자다. 도대체 영주권자 등 비시민권자가 더 위험하다는 논리가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투표권이 없어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 해서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당국이 비시민권자 모두를 타겟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옛 일을 들추어 구금하고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다. 잘못이 있어도 앞으로 잘하길 바라며 격려하는 나라다. 그렇게 하지는 못할 망정 과거의 잘못을 빌미 삼아 운신을 옥죄고 인권을 유린하는 것은 전혀 미국답지 않은 행위다. 한 두 번 과오가 ‘평생 족쇄’가 되는 사회 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거시담론뿐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치명적이다. 체포됐다 풀려난 사람이나 아직도 수감된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가족과 주위에 사적인 부분이 공개되는 아픔을 겪고 있다. 일례로 젊어서 마약에 손을 댔으나 갱생해 새 사람이 됐고 결혼한 뒤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운 과거를 자신의 기억에만 간직하고 싶을 게다.
이민국의 무분별한 업무집행으로 무고한 이민자들이 입은 상처는 누가 치료해 줄 것인가. 테러 정국이 계속되는 한 이 같이 비상식적이고 반인권적인 일이 이어질 것이다. 조국안보란 핑계로 다루기 쉬운 대상을 고를 것이다.
‘사회적 약자’인 소수계 비시민권자이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법적 대응으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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