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글에서 널뛰기

2002-11-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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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뛰기는 게임의 규칙만 잘 지키면 쓸모가 많은 우리 고유의 놀이다. 외부 출입이 제한적이던 옛 아낙네들은 눈총 받지 않으면서 하늘로 솟아올라 담 너머에서 오고가는 남정네들을 볼 수 있었다.
남편이 옥에 갇혀 도통 얼굴을 보지 못한 여인은 이심전심의 여인과 의기투합해 옥 담 옆에 널을 놓고 뛰어오를 때마다 잠깐잠깐 남편을 보곤 했다고 한다. 민첩성을 길러주고 높이뛰기 실력도 키워주는 전신운동이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몸도 튼튼하게 해주는 널뛰기의 묘미는 놀이에 참가한 쌍방은 물론 구경꾼들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데 있다. 널뛰기를 즐기려면 상대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한쪽이 널을 내리 밟아야 다른 쪽이 공중으로 치솟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원리 때문이다. 그러니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는 널뛰기를 오래 지속할 수 없다.
널뛰기의 매력은 체급에 별로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체중이 무거우면 널 중심 쪽으로 이동하면서 균형을 잡는다. 상대방을 생각해줄수록 재미가 배가되는 놀이가 널뛰기다. 내 입장만 세우다간 판이 깨지고 모두를 실망시키는 게 널뛰기다.
요즘 비디오업계에 분규가 생겼다. 비디오를 배급하는 총판과 소매업소 간 갈등이 소송으로 비화돼 ‘비디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시비는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총판과 업소는 상호 경쟁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먹고 먹히는 치열한 경쟁사회이지만 강자만이 살아 남는 ‘정글의 법칙’을 고집해선 곤란하다.
총판과 소매업소는 널을 뛰는 장본인들이다. 총판은 소매업소가 잘 돼야 비디오를 팔 수 있고 소매업소는 총판이 좋은 비디오를 대 주어야 장사를 할 수 있다. 그러니 비디오 배급을 둘러싸고 돌출한 이견을 대화로 풀지 않으면 그 책임을 따지기 전에 업계전체가 상처받을 수 있다. 체중 다른 두 사람도 널뛰기를 할 수 있는 것처럼 힘이 센 쪽이 조금 더 양보를 하면 일이 술술 풀릴 게다.
사실 총판과 업소의 긴장관계에는 방송국과 소비자를 포함한 4자 구도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다. 방송사에 밉보이면 총판을 따내기 어렵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방송사는 총판 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방송사가 총판 위에 ‘군림하는’ 사이가 되기 십상이다. 방송사는 또 프로그램을 늦게 방송해 TV를 보다 답답해진 소비자들을 비디오업소에 가게 한다. 이렇게 소매업소의 생존을 돕고 있다.
총판은 소매업소에 매달 일정액을 받고 여러 개의 비디오를 패키지로 공급한다. 업소는 소비자의 구미에 맞는 비디오만 고를 수는 없다. 원본료도 시빗거리다. 총판과 소매업소는 공생관계이면서도 간간이 묘한 대립각을 세운다. 소매업소는 ‘비싼’ 원본료를 지불했으니 대여료를 인상하거나 중고 테입에 겹치기 복사를 해 운영비를 줄이려 한다.
그러다 보니 소비자들은 빌려온 비디오 테입의 화질이 나빠 짜증스러웠던 경험이 여러 번 있을 게다. 하지만 한번 빌려간 비디오를 길게는 한달 씩 뭉개는 소비자들이 적지 않으니 소매업소로서도 새 테입에 복사해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이처럼 4자가 얽히고 설킨 게 비디오 장사다.
방송사는 널과 가운데 받치는 가마니를 준비해 판을 벌였고 총판과 소매업소가 널 위에 올라가 뛰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관람료를 내고 이 광경을 신나게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마당이 되게 하려면 방송사, 총판, 업소, 소비자들이 4자 구도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업무상 접촉이 잦고 그만큼 의견충돌의 소지가 많은 총판과 소매업소의 관계가 원만해야 말썽이 없다.
“바구니에 계란과 돌멩이를 함께 넣은 채 마구 흔들면 계란만 깨져버린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서로 조심하지 않고 치고 받으면 계란은 박살나고 강한 돌멩이도 깨진 계란을 뒤집어써 꼴불견이 된다. 영 딴판이라도 서로의 영역을 무시해선 절대로 공생할 수 없다. 총판과 소매업소의 ‘함께 사는 타협’을 기대해 본다. 정글 같은 상황일수록 널뛰기의 지혜를 떠올려야 한다.
박 봉 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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