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인‘뿌리’잊으면 실패 자초

2002-11-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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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이니 무조건 지지’는 옛말
2세 이끌어줄 네트웍 구축할 때

컵에 물이 절반 정도 찼을 때 반응은 “절반이나 된다”와 “절반밖에 없다”로 양분된다.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도 갈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긍정적인 시각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관점이라 해서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한인 후보들이 여러 명 출마한 중간선거의 결과에도 ‘물 컵의 양면’을 적용할 수 있다. 신호범 워싱턴 주 상원의원이 재선에 성공했고, 실비아 룩 장 하와이 주 하원의원이 3선의 위업을 이뤘으며 최석호 어바인 통합교육구 교육위원이 2선 위원이 됐다. 주류사회에서 기반을 다진 이들의 성취가 곧 우리 모두의 성취인양 자랑스럽다.
반면 아시안으론 처음으로 하와이 주 하원의원이 돼 화제를 뿌렸던 재키 영씨가 주 상원에 도전했다 고배를 마셨다. 가든그로브 시의원에 출마한 박동우씨, 하와이 주 상원에 출사표를 던진 최경환씨, 연방하원을 노린 김기현씨는 분패해 한인 지지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승자들을 쳐다보면 흥이 나지만 패자들을 둘러보면 착잡하고 측은하다. 지지자는 물론 한인사회 전체의 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희비가 더욱 선명하게 교차된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승패의 두 현상을 고루 집고 기쁨과 교훈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재선, 3선의 큰 업적을 이룬 당선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롤 모델이란 점에서 영광과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 “한인사회의 지원을 잊지 않겠다”는 당선 소감이 그저 하는 소리여서는 안 된다. 자만하지 말고 주류사회에서 토대를 공고히 하고 유망한 2세들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유기적인 네트웍을 구축하고 정치 지망생들도 대거 참여시켜 이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짜낼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에게 정치를 배울 인턴 기회를 알선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과거 한 한인 정치인이 커뮤니티의 물적 심적 지원에 힘입어 당선된 뒤, 주류사회 눈치 보느라 한인들과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기피해 두고두고 씁쓸한 뒷말을 남긴 적이 있다. 뿌리를 잃으면 재선, 3선도 포말처럼 순식간에 부서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번 선거에 패한 후보들은 ‘입문’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재키 영은 하와이 주 하원의원으로 이름이 꽤 알려진 기성정치인이지만 주 상원에는 처음 도전한 ‘신인’이랄 수 있다. 후보들은 새로운 정치판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험난한가를 이번에 똑똑히 체험했을 게다.
낙선후보들의 득표율은 이들이 정계 입문을 위해 몇 갑절 많은 땀을 흘리고 공부를 해야 함을 웅변하고 있다. 재키 영 후보는 43.5%로 라이벌보다 13.1%포인트가 뒤졌다. 박동우 후보는 22.2%를 얻어 2명 뽑는 시의원선거에서 3위를 했다. 2위에 7.3%포인트가 뒤져 석패했다. 최경환 후보는 38.9%를 얻어 일본계 후보에 22%포인트나 떨어졌다. 김기현 후보는 14%를 획득해 당선자의 83% 득표율에 턱없이 밀렸다. 뒤집기가 녹록치 않은 편차이니 만큼 재도전할 뜻이 있다면 패인을 면밀히 분석해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다음 선거시즌이 임박했을 때 선거후원회를 급조하고 한인사회에서 선거자금과 지지를 구하려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후보라면 백전백패일 것이다. “후원회에서 돈을 모아주니 내 돈 들어가지 않고 선거에 떨어져도 이름은 알려지니 밑질 것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깊이 반성할 일이다. 정계에 입문해 웅지를 펴고 한인의 위상을 높일 의지가 있다면 와신상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타인종 밀집 주거지역에서 몰표를 받을 수 있다”는 허황한 생각이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낫다.
후보는 후보대로 각성하고 한인사회는 다음 선거에서 ‘엉터리 후보’를 솎아 내야 한다. 이번 선거결과 득표율이 많고 적음이 반드시 그 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 문제는 후보의 태도다. 한인사회의 지원을 열매맺지 못해 진정으로 가슴아파하고 미안해하며 다음에는 기필코 성원에 보답하겠다는 결연함을 보이는 후보는 도와줄 만하다. 자질 없이 정치한답시고 민폐만 끼치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다. 몸가짐, 마음가짐이 바르고 능력을 겸비한 정치지망생이라야 밀어줄 수 있는 것이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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