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민주당의 업보
2002-11-07 (목)
철학 없는 정당 국민 지지 못받아
부시, 자타공인 ‘공화당 1인자’ 부상
이변이다. 중간 선거는 집권당이 지는 게 관례다. 거기다 경기도 좋지 않다. 주가는 2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이고 실업자는 계속 늘고 각종 경기 지표도 우울하다. 거기다 엔론 등 각종 기업 스캔들이 연일 터지고 있다. 객관적인 정황으로 보면 민주당이 압승을 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도 결과는 참패다.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중간 선거에서 이긴 적은 간혹 있었다. 1934년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1998년 클린턴 때가 그랬다. 그러나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중간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1902년 시오도어 루즈벨트 이후 처음이다.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의 압승은 예상된 것이 아니었다. 기껏 해야 하원 다수당 위치를 지키는 정도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상원 탈환은 물론 하원 의석 수까지 늘어났다. 박빙이 예상되던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는 클린턴과 고어의 준동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표 차로 재선됐다. 전직 부통령이자 대선 후보까지 지냈던 먼데일도, 로버트 케네디의 딸로 당선이 확실시되던 타운센드도 무명인사에게 졌다. 왜일까.
민주당 참패의 직접 원인은 부시다. 이번 선거에서 부시는 9·11 테러 이후 올라간 높은 인기를 정치적 밑천으로 정신 없이 뛰었다. 선거 자금으로 역대 최고인 1억 3,000만 달러를 모금했을 뿐 아니라 선거를 며칠 남겨 놓고 3~4일 사이 15개 주를 도는 강행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그러다 선거에 지면 대통령 체면만 손상된다’고 우려했지만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 과감하게 도박을 한 것이다. 그 결과 부시는 자타가 공인하는 공화당 제1인자로 확고히 자리를 굳혔다. 2년 전 플로리다에서 수 백 표 차로 간신히 대통령이 됐을 때와는 그 위상이 하늘과 땅 차 이다.
백악관과 상 하원을 모두 장악한 공화당과 부시에게도 위험은 있다. 이라크와 전쟁을 하다 희생자가 의외로 많이 발생할 경우, 경기가 계속 나빠져 대량 실업 사태가 날 경우 그 책임은 고스란히 공화당과 부시에 돌아가게 됐다. 그러나 그건 훗날 일이고 오늘의 승자는 부시다.
이번 패배의 근본 원인은 민주당 자신에서 찾는 것이 옳다. 경기 침체와 금융 스캔들 등 호재에도 불구, 이를 공화당 탓으로 몰아 부치는 전략도, 경기 회복과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청사진도 제시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 다녔다. 민주당 리버럴 일각에서는 차라리 부시의 대규모 감세안과 이라크 강경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그 대안을 내놨더라면 결과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자성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부시의 높은 인기도 때문에 민주당 지도부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지아 주에서는 부시의 이라크 결의안에 반대한 현직 상원의원이 “비애국적”이란 신출내기 도전자의 공격에 나가 떨어졌다. 월남전에 갔다 한 팔과 두 다리를 잃은 전쟁 영웅인데도 말이다. 이번 선거 결과로 대슐 상원 민주당 원내 총무와 겝하트 하원 민주당 원내총무는 2004년 대권 도전의 꿈을 접어야 하게 됐다.
한 때 민권 운동을 주도하며 ‘미국의 양심’ 자처하던 민주당은 아이덴티티를 잃어가고 있다. 재정 고갈이 불을 보듯 뻔한 소셜 시큐리티의 현상 유지, 메디케어에 처방약 혜택 포함시키기, 그 무용성이 입증된 이라크 유화 정책 등이 아이디어의 전부다. 믿음이 가는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정당에 미 국민들은 권력을 맡기지 않는다.
지금 민주당이 갈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가만히 앉아 국내와 국외에서 부시 행정부가 하는 일이 잘못되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공화당에 맞설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것이다. 부시는 당선 된 후 대대적인 감세, 테러와 대량살상 무기 개발국에 대한 응징, 소셜 시큐리티의 민영화 등 소신을 실천에 옮겨왔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부시가 무슨 입장을 지지하며 어떤 인물인가는 분명히 안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이런 이슈에 대한 소신도 대안도 없다. 감세를 반대하는 것 같다가 찬 표를 던지고 이라크 무력 사용에 반대하는 척 하다가는 지지하는 식이다. 2004년 대선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는 고어만 해도 2000년 대선에서 온건파를 자처하다 인기가 떨어지자 갑자기 대중 선동적 정치인으로 돌변했다. 시시각각 임기응변으로 얼굴을 바꾸는 그의 태도는 민주당 현주소의 상징 이다.
어떤 나라 건 지역이건 한 당이 정권을 독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민주주의 하에서 참패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만년 소수당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반성이 앞서야 한다. 민주당이 30년대 대공황 이후 3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권좌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소수계와 약자를 위한 정당이란 기치와 내걸었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80년대 레이건 혁명 이후 지금까지 미 정계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도 리버럴리즘의 폐해를 비판하고 작은 정부와 개인의 자유 등 명분을 축적한 탓이다.
철학이 없는 ‘me too!’ 정당은 소수당의 설움을 각오해야 한다는 게 이번 선거가 민주당에게 주는 교훈이다.
민경훈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