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향기를 음미하는 인생은 아름답다

2002-10-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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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와인 시음에 꼬박 5년

▶ 김행오씨 주축 6년째 매달 1회 시음 30~70대 회원들 세대 뛰어넘어 우정


와인의 빛깔은 어쩜 그렇게 영롱할까. 그 고운 색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인생은 장미 빛으로 물들어온다. 향수보다 깊고 짙은 와인의 아로마. 눈을 감고 투명한 잔에 담긴 와인의 향기를 코로 흠뻑 들여 마셔본다. 한 잔의 와인은 포도 열매를 영글게 해주었던 태양 빛과 흙, 대지를 적셨던 비의 비릿한 향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짜릿하게 목을 타고 내려가는 와인은 우리들의 몸 속에 들어가 마법을 부린다. 차가웠던 피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온 몸의 세포는 꼭 닫아 두었던 빗장 문을 서서히 열며 감각은 민감하게 살아난다. 와인의 달콤한 취기는 우리들을 노래하는 시인, 사랑에 빠진 연인으로 만든다.

두려움 없이 살았던 진정한 자유인, 그리스인 조르바는 와인을 마실 때마다 마치 세상에서 처음 마시는 것처럼 감동했다고 니코스 카찬차키스는 적고 있다.
“이 와인이 몸에 들어가서 도대체 어떤 비밀스런 일을 행하기에 저 늙은 암컷(부블리나)이 그렇게 예뻐 보이는 걸까요? 말해줘요, 두목.”
와인은 팅커벨이 별빛을 반짝이며 휘두르고 간 마법의 지팡이처럼 여자를 예뻐 보이게 하는 것은 물론 삶도 영롱하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한인사회에서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와사모. 회장 오형원)이 시작된 지도 벌써 6년째에 접어든다.
50년간 와인을 즐겨온 와인전문가로 매주 본보지면을 통해 와인을 추천해 주고 있는 김행오씨와 현대화랑 대표인 김학용씨가 주축이 되어 시작한 와사모는 매달 한 차례의 정기 모임에서 약 12-15병 정도의 와인을 시음하며 와인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인생을 함께 나누고 있다.
모르고 마셔도 좋은 와인이지만 알고 마시면 더욱 깊게 음미할 수가 있다. 3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회원들은 와인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인해 세대 차를 뛰어넘는 친구가 된다.
와인 전문가 김행오(75)씨가 없었다면 와사모는 비오는 날 모여 술 마시는 ‘우주회’처럼 그저 평범한 술친구들의 모임으로 머물 수도 있었을 게다. 그는 어떤 연유로 와인과 연을 맺게 된 걸까. 22세 때 UN 관계 일로 프랑스 땅을 밟은 그는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마법의 붉은 액체를 맛보게 된다.
그후 PX를 통해 와인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해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도대체 이 와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와인 전문 서적과 잡지를 사다가 비교 분석해가면서 체계적으로 와인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그의 이름 석 자 앞에는 ‘와인 전문가’라는 호칭이 따라다니게 됐다.
적당하게 마시면 세상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도구가 되지만 지나칠 경우엔 우리의 모든 존재를 옭아맬 수 있는 굴레가 되는 것이 와인. 그렇고 보니 와인만큼 ‘조금 부족한 듯한 중용의 미덕’을 수행할 수 있는 방편도 없는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하루에 두 잔 정도를 마시던 그이지만 요즘은 하루 한 잔을 천천히 눈과 코, 혀 등 모든 감각 기관을 동원해 충분히 느끼며 즐긴다.
요즘 마시는 와인은 10달러 내외. 이제껏 많이 마셔본 이력이 있다보니 그는 저렴하면서도 맛이 좋은 와인을 선택하는 비상한 재주를 갖게 됐다. 와인 전문 서적이나 잡지에 나오는 품평 리스트를 참고해 고르면 거의 실수가 없다. 캘리포니아 와인으로는 1997년 나파 밸리와 소노마 카운티에서 생산된 것들이 대체로 좋다고.
음식에 따라 다양한 와인을 즐기는 그이지만 아무래도 농염한 여인 같은 무게가 있는 레드 와인을 선호한다. 생선이나 가금류를 즐길 때면 향기롭고 상큼한 화이트 와인도 식탁에 오른다. 프랑스가 원산지인 캬버네 소비뇽, 샤도네 등의 포도는 캘리포니아의 기후, 토질과 잘 맞아 떨어져 세계적으로 빠지지 않는 훌륭한 와인을 빚어내고 있다.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 와인의 시음으로부터 시작을 했다. 그 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의 와인으로 세계를 일주하는데 꼬박 5년이 걸렸다. 올해 초부터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복습하고 있는데 10월중에 캘리포니아 와인을 마쳤고 앞으로 1년 동안은 가장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프랑스 와인에 대해 함께 공부할 예정이다.
오세규(사업)씨는 참여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모임에 애정을 갖고 열심히 나온다. 오형원(의사)씨가 와사모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약 2년 전. 한 번 발을 들여놓고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임에 참석을 했다. 의사인 그는 와인이 얼마나 건강 유지에 도움을 주는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본인. 레드 와인은 암과 노화의 원인이 되는 활성 산소 제거에 탁월하며 다량 함유돼 있는 안토시안닌 성분은 세포의 독성을 감소시킨다. 혈액 생성 장애 치료 효과와 면역 시스템 자극에 있어서도 레드 와인은 뛰어나다.
모임이 처음 시작될 때의 분위기는 조금 맹숭맹숭했다. 오늘 처음으로 시음한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만든 메를로 2000년도 산(Merlot Christian Moueix). 아직 발효가 충분히 되지 않은 어린(Young) 와인인지라 마시기 전 충분히 공기와 결혼을 시켜줬다. 첫맛은 항상 강하다. 그리 고급 와인은 아니지만 빛깔 곱겠다 향기 좋겠다, 목 줄기를 짜르르 적신다. 오늘 안주는 레드 와인에 어울리는 치즈와 크래커, 바게트 빵, 살라미와 프로슈또, 견과류가 주종을 이루었다.
뒤를 이어 프롱삭, 생떼스떼프, 생떼밀리옹, 생줄리앙의 레드 와인을 시음했다. 잔이 더함에 따라 더욱 좋은 와인이 부어지니 회원들의 얼굴에 점차 홍조가 짙어간다. 와인이 부드럽게 매만져준 마음은 대문처럼 활짝 열리고 와인에 대한 김행오씨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전환된다.
지난여름 샌타바바라의 와이너리로 나들이를 떠나기도 했던 와사모에서는 내년 여름 캘리포니아 최고의 와인 산지인 나파 밸리를 둘러볼 예정이고 내후년에는 프랑스의 보르도와 브루고뉴 지방의 와이너리로 함께 여행을 떠날 계획을 갖고 있다. 매달 1회 시음회 겸 모임을 갖는 와사모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213) 487-2790, 김학용 총무에게 하면 된다.

시음시 주의할점

식사 직전인 오전 늦게나 오후 늦게, 피곤하거나 아플 때, 김치나 박하·카레 등 맛이 강한 음식을 먹은 뒤, 담배나 커피 등 강한 향을 맡은 직후, 주위에서 향수 등 강한 향을 발산할 때는 와인의 미묘한 향을 느낄 수 없으므로 시음을 하지 않는다. 술이 약한 사람은 따라주는 대로 모두 마시지 말고 한 두 모금 맛만 본 후 남은 것을 앞에 놓인 통에 쏟아 버리는 것이 좋다.
순서는 화이트 와인을 먼저 한 후, 레드 와인으로 옮겨간다. 와인을 시음할 때는 먼저 와인의 색깔을 감상하고 잔을 흔들어 공기와 결합시킨 후 코로 냄새를 충분히 음미하고 입으로 맛을 본다. 한 모금 살짝 머금고 입안 구석구석 와인이 닿도록 굴린 후 마지막으로 삼킬 때는 깊숙이 어떤 맛이 남는지를 분간하며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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