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북한의 개혁과 개방, 그리고 북미관계

2002-10-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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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지난 9월 24일 신의주에다 특별행정구를 설치하고 자유경제체제를 도입하는 법을 제정하고 공포했다.

미국의 권위지 뉴욕타임스는 9월 24일자에 해설기사를 싣고 신의주 경제특구는 ‘북조선이 수립된 후 가장 중대한 경제정책의 변화이며 독자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설치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은 과연 중국과 같이 개혁의 길을 선택하고 개방정책을 수립하여 변화의 길을 모색할 것인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1991~1992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초빙교수로 1년동안 학부 강의와 대학원생 세미나 강의를 하면서북한에 관한 토의를 많이 했다. 그 당시 소련과 동구권의 공산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폭풍처럼 불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학부 학생들은 대부분 북한의 변화를 예감하고 있었으나 대학원 학생들은 북한의 개혁과 개방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필자는 북한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혁과 개방이 불가피하다고 예측하였다. 그것은 10년 전의 일이다.

1994년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3년간의 유훈정치의 시대를 거치면서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으로서 북한의 권력을 확고히 장악하였다. 1998년에는 북한의 헌법을 바꾸고 새로운 정부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1994년부터 시작한 북한의 홍수와 한해 같은 자연재해 때문에 북한사람들은 식량부족으로 기아선상에서 헤매게 되었고, 전력난으로 고통을 받았다. 김정일은 러시아와 중국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북한의 살아남을 길을 모색한 것이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북한이 살아남는 길은 개혁과 개방의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김정일은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남북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북한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일은 중국식 개혁을 모델로 하여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고수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서서히 도입한다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중국 베이징을 비공식 방문하고 장쩌민 주석과 회담함으로써 1994년 집권 후 처음으로 해외순방에 나섰다.

2001년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김정일 위원장은 중국 베이징, 상하이를 비공식 방문하고 중국의 개혁과 개방정책을 공부했다. 그리고 2001년 7월 26일부터 8월 18일까지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고 푸틴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개방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또 2002년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러시아의 극동을 비공식 방문하고 푸틴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북한은 지난 7월 19일 쌀 배급제를 시장경제 구입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북한의 물가와 급여(봉급)를 대폭 인상하고 배급제를 폐지했다. 북한은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의 개혁과 개방 모델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북한 변화의 핵심은 기업의 자율권을 인정하는 ‘기업책임경영제’를 도입하고 인센티브를 강화해서 물가의 변화는 물론 가격 개혁 환율
조정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개방의 제1단계로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를 9월 17일 평양에 초빙하고 정상회담을 통해 국교 정상화를 이루는 동시에 일본이 제공하는 7억달러 내지 10억달러의 보상금으로 경제를 활성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한반도 특사 제임스 켈리 국무부차관보는 10월 3일부터 5일까지 북한을 방문하고 북미간의 대화의 물꼬를 터놓은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대미관계는 미국외교의 ‘단일주의’와 북한의 대량 살상무기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북미수교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평(정치학박사, 커네티컷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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