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적극적 신고로 “숨을 곳 없다” 깨우치자

2002-10-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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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도피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사기, 횡령, 서류 위조 등에서부터 살인에 이르기까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는 훌쩍 넘어와 은신할 수 있는 곳으로 통한다. 대다수 한인들이 먹고사느라 열심인데 이들 도피자 상당수는 숨겨 놓은 돈으로 유유자적하고 있다. 더 이상 이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눈을 부라려야 한다.

한량 같은 생활로 근면한 한인들 위화감 불러
대통령 선거 전후 ‘켕기는 인물들’ 줄 이을 듯
이름과 얼굴 잘 익혀두고 발견하면 꼭 신고를


지난 8월 2일 밴나이스 우들리 레익 골프장. 70년대 말 대학가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지금은 ‘가요계의 대부’로 불리는 이수만씨 일행이 밤 8시가 넘도록 골프를 즐겼다. 한국의 SM엔터테인먼트 대주주인 이씨는 지난 99년 회사 유상증자과정에서 공금 약 11억 원을 빼낸 뒤 주식을 취득해 수백 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은 혐의로 입건된 상태이다.
검찰의 수사가 조여오자 미국으로 온 이씨는 “생각을 정리한 뒤 연락하겠다”고 할 뿐 귀국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혐의 사실에 대해 떳떳하면 굳이 남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숨어 살’ 이유가 없을 게다. 이곳에 체류하면서도 이메일 등을 통해 업무 지시를 하고 있다니 뻔뻔하기 짝이 없다. 입건된 주제에 미국에 와서 평일에 고급차를 타고 골프나 치러 다니는 모습은 위화감을 조성할 뿐이다. 자성하고 귀국하는 게 최선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차선으로 커뮤니티가 힘을 모아 쫓아내야 한다. 이대로 방치하면 한인사회를 탁하게 할뿐이다.
경기도에서 마켓을 운영하면서 약 15억 원의 부도수표를 남발해 사기 혐의 등으로 수사 대상에 오른 강주현씨가 LA로 도주한 뒤 가명과 콧수염으로 신분을 위장하다가 지난 99년 휴스턴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체포돼 한국에 인도됐다. 회사에서 약 30억 원을 횡령한 뒤 도망 온 한영철씨는 LA 한인타운에서 체포돼 2001년 10월 본국으로 송환됐다. 숨어사는 이들에겐 간담이 서늘해지는 얘기겠지만 지금이라도 미국이 안전한 도피처가 아니며, 지난 99년 12월 발효된 한미간 범인인도조약으로 체포, 송환이 수월해졌음을 직시해야 한다. 도피자의 가족, 친지도 미국에 뻗쳐 있는 ‘거미줄 수사망’을 인식해 귀국을 종용하는 게 도피자를 진정으로 아끼는 것이다.
한미간 법적 제도적 공조체제가 구축돼 있어도 여전히 미국은 ‘도피 희망지역’이다. 미국의 사법제도가 유죄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무죄로 여기는 점, 미 치안당국이 넓은 땅에서 소수 한국인을 체포하는데 열의를 보이지 않을 것이란 점, 연고자가 있어 생활이 편하고 다른 나라에 비해 낯설지 않다는 점이 미국으로의 도피를 자극하고 있다는 게 치안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래서인지 2000년 이후 해외로 도주한 형사사범 1,521명 가운데 ‘미국행’이 774명으로 단연 1위다. 또 올 들어 7월까지 해외로 도주한 경제사범 가운데 46%인 294명이 미국을 은신처로 택한 사실이 그 선호도를 입증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미주한인사회에 골칫거리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수 도피자들이 사기, 횡령에서부터 마약, 조직폭력, 살인에까지 파렴치하고 흉악한 사건에 연루돼 있으니 이들을 솎아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2000년 롱비치에서 체포돼 송환된 최수혁씨와 동거녀 정효실씨가 97년 전남에서 발생한 최씨 약혼녀 살해, 암매장사건 용의자였다는 것은, 언제든 또 다른 ‘인면수심’이 한인사회에서 활보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일부 도피자는 한인사회 마저 더럽히고 다닌다. 2001년 1월 뉴저지주 한인은행을 상대로 28만 달러 위조수표 사기혐의로 전국에 수배된 정보영씨는 한국에서도 금융사기 혐의로 수배중인 인물이다. 최근 LA에 있을 것이란 게 경찰의 추정이니 여간 떨떠름한 게 아니다.
도피자를 색출해 본국으로 송환한 뒤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은 사필귀정을 논하기 앞서 미주 한인사회의 정화차원에서도 시급한 과제이다. 한미간 범인인도조약으로 도피자들을 압박하고 있지만 정부차원의 수사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몰려드는 도피자들을 일일이 검거하기가 버거운 현실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LA는 도둑놈 소굴”이란 비아냥거림을 애써 못들은 척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한인사회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손수 나서야 할 때가 됐다. “내가 어떻게 도피범을 잡아”할 게 아니다. 재일 동포 여성의 부탁으로 일본인을 살인하고 미국으로 도주한 한국인 서모씨를 미 연방검찰이 검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TV 프로에서 서씨 사건을 접한 미시건의 한 한인의 신고였다. 평범한 주민이 살인 용의자를 잡은 것이다.
미국에 주재하는 한국 공관이 이 사안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인력이 제한된 관계당국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더욱이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뒤가 구린’ 사람들이 미국으로 넘어와 악취를 뿜어댈 게 뻔하다. 한인사회의 오염을 막으려면 하는 수 없다. 언론에 오르는 도피자들의 얼굴을 잘 봐뒀다가 주위에서 발견하면 “귀찮다” 생각 말고 전화를 걸어야 한다. 깨끗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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