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권연장 안간힘 주민복지는 뒷전

2002-10-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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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진짜 변하나

일본 총리가 처음 평양을 방문하고 부시 대통령의 특사가 김정일을 만나는 등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과연 북한이 정말 변하고 있는 것인지 또 한 편의 연극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미 언론과 전문가들의 분석을 통해 조망해본다.

신의주, 거대한 ‘포템킨 마을’ 가능성
양빈, 탈세 혐의에 주가 폭락으로 곤경
미·일 관계 개선 없이 투자 유치 힘들듯

포템킨 장군은 러시아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의 하나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의 하나인 에카테리나 여제 등극에 결정적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중앙 아시아 진출에도 큰공을 세웠다.
그에게는 일화도 많다. 우크라이나 지역 개발을 위해 야심 찬 계획을 세웠으나 당초 예상보다 물자가 턱없이 모자랐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돼 간다고 보고해놨는데 여제가 직접 순시하겠다는 전갈이 왔다. 다급해진 그는 건물 앞면만 그럴듯하게 꾸민 뒤 여제를 안내했다. 일단 위기는 모면했지만 그 후 ‘포템킨의 마을’ 이란 단어는 겉만 번드르르 한 가짜 업적의 표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은 최근 신의주 일대를 경제 특구로 지정하고 사실상의 치외법권 지대로 인정하는 획기적인 안을 발표했다. 외국 투자가의 불신을 해소시키기 위해 행정 책임자를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으로 하고 사법 체제도 유럽인에게 맡긴다고 밝혔다. 말대로만 된다면 북한 건국 이래 최대의 변화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과연 진정한 개혁과 개방의 신호로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북한 판 ‘포템킨 마을’로 봐야 할 것인가.
북한은 지난 수개월간 일련의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환율과 물가를 현실화하고 능력에 따른 소득 차별화를 인정하는가 하면 일본 총리를 초청해 수 십 년 간 부인해 오던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북한의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정일도 낙후될 대로 낙후된 북한 체제를 이대로 이끌고 갈 수는 없으며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최근 평양을 방문한 워싱턴 포스트의 한 기자는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행상을 볼 수 있었으며 한가롭기 짝이 없던 평양 거리가 때로는 교통 체증이 생길 정도로 차가 늘었다고 전했다. 대부분 일제 중고차지만 어쨌든 차를 굴릴 수 있는 사람 수가 증가했다는 것 이다.
시내에 빠찡꼬 업소가 생겨 시민들이 이를 즐기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평양의 한 외국인은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라고 말했다.
LA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신의주를 경제 특구로 만들기로 구상한 지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신문은 서울의 소식통을 인용, 이미 5년 전부터 북한 당국은 충성도가 의심스런 주민들을 조용히 신의주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으며 그 일대에 철조망을 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을 자주 방문해온 유럽 연맹 상공회의소의 서울지부장 장 쟈크 그로아는 “북한은 이미 오랜 신의주 남쪽에 신도시를 건설해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경제 특구 행정 책임자로 임명된 양빈은 이주자를 위해 5,000만 달러를 투입, 신의주 외곽에 아파트 단지를 짓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이 같은 움직임을 ‘다급해진 김정일의 최후 발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월스트릿 저널은 최근 사설을 통해 2년 전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상기시키며 김정일이 회담 조건으로 4억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회담 일자를 느닷없이 하루 연기한 것도 계좌 추적을 피하기 위해 돈을 하도 이리저리 돌렸기 때문에 결제가 늦어져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과거 김정일의 행적을 보면 이런 주장이 그럴 듯하다는 게 이 신문의 생각이다. 클린턴 행정부 때도 핵 개발 중단 대가로 2개의 경수로를 받아냈지만 지금까지 핵 사찰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신의주 경제 특구의 행정 책임자로 임명된 양빈이라는 자도 탈세 혐의로 중국 정부의 조사를 받고 있으며 그의 주 기업인 유로 아시아 농업사도 주식 거래가 중단된 상태로 주가가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인물이 경제 특구를 제대로 운영할지 의심스럽다.
김정일은 100억 달러의 배상금을 받기 위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할 정도로 다급한 상태다. 김정일의 신의주 경제 특구 지정은 경제 개혁을 통해 북한 주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의도보다는 외국인 투자가들이 가져온 돈을 뜯어 정권 연장에 보태자는 속셈이 더 크다고 봐야한다.
이곳에 다녀온 한 미국 방문객에 따르면 신의주는 “한반도에서 가장 황량한 곳”이다. 관세가 없고 14%의 소득세만 내면 된다고 하지만 이런 곳에다 철벽을 쌓고 수십 만의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켜 만든 인조 도시가 순조롭게 성장하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자치를 보장했다고는 하나 시작부터 외국인 무비자 입국 결정을 제멋대로 번복하는 북한이다. 바로 강 건너 20년이 넘는 경제 개혁으로 외국인 투자 여건이 자리잡은 중국이 있는데 이를 놔두고 부시 행정부에 의해 ‘악의 축’ 국가로 찍혀 있는 북한에 굳이 투자하려는 기업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김정일의 사과를 받고 돌아오면서 한껏 치솟았던 고이즈미의 인기가 수그러들고 있는 것도 투자 유치를 위해 필요한 미일 등 과거 적대국과의 관계 개선이 순조롭지 만은 않을 것을 예고한다.
지난 한 달 간 일본열도는 납치된 일본인 뉴스로 들끓었다. 그러나 피랍 일본인의 사망에 관한 북한 측 발표를 유가족들이 ‘믿을 수 없다’고 들고 나오는 바람에 고이즈미는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이들 일본인 중 일부는 북한에서 결혼해 같은 날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 북한 당국 입장이지만 유가족들은 이들이 처형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사망 원인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 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북일 관계 개선에 계속 걸림돌로 남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특사를 파견했다고는 하나 김정일에 대한 불신이 워낙 깊어 획기적인 외교적 합의를 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이미 함경도 나진 선봉 일대에 경제 특구를 마련해 본 적이 있으나 외국 투자가들의 관심 부족과 북한 당국의 개혁에 대한 두려움으로 실패로 돌아간 바 있다. 건국이래 최대 실험인 신의주 특구 역시 ‘동북아시아의 홍콩’이 되기보다는 ‘압록강의 나진 선봉’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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