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얀 코끼리

2002-10-01 (화)
크게 작게
고대 타일랜드에 샴 왕국이 있었다. 코끼리가 주요 노동수단이었던 샴 왕국에서는 이상한 풍습이 있었다. 코끼리가 태어나면 ‘살림밑천’이라고 좋아했지만 흰 코끼리에는 판이한 반응을 보였다. 샴 왕국에선 흰 코끼리를 신성시했으며 왕이 그 주인이 됐다. 그리고 신처럼 떠받들었으니 일을 했을 리가 없다.
샴의 왕은 이 하얀 코끼리를 자신이 싫어하는 신하에게 선물로 주었다. 왕에게 ‘찍힌’ 신하가 신성한 이 코끼리를 부려먹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설상가상, 엄청나게 먹어대는 통에 유지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일 제대로 먹이지 않아 피골이 상접해 지기라도 하면 괘씸 죄에 걸릴 수 있어 울며 겨자 먹기로 ‘모실’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래서 흰 코끼리는 지금도 무용지물의 대명사로 곧잘 인용된다.
한인들이 120여만달러를 모으고 한국 정부가 320여만달러를 지원해 세워졌으나 반년이 지나도록 제구실을 못하는 LA 한국교육원의 ‘첫 학기 성적표’는 샴 왕국의 ‘하얀 코끼리’를 연상케 한다. 우여곡절 끝에 5년만에 문을 연 교육원은 뿌리교육의 산실과 한인사회의 명실상부한 문화전당으로 자리잡을 것이란 기대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오랜 세월 지지부진한 개원작업으로 애를 태워온 한인들은 교육원 개원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우수한 시설과 자료가 정작 필요한 한인들에겐 그림의 떡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교육원 강당의 첨단 음향 및 조명시설을 꾸미는데 100만달러가 들었고, 자료실에는 한국 시청각자료 170여개와 장서 1만5,000여권이 구비돼 있어 솔깃할 만하다. 헌데 이 좋은 시설과 자료가 ‘놀고’ 있는 데 문제가 있다. 아무리 맛난 굴비라도 밥상에 오르지 않고 기둥에 매달려 있으면 아쉬움만 더하게 된다.
교육원이 커뮤니티와 겉돌고 있는 것은 그 문지방이 높은 데 있다. 문턱을 낮추거나 없애 한국을 배우고 알리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로이 부담 없이 드나드는 ‘우리 마당’이 돼야 한다. 개원 이후 교육원을 빌어 치른 행사가 11건이고 문화공연은 불과 두건뿐이었다는 사실은 교육원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루 500~700달러의 대관료에 유료 주차비가 부담스러워 발길을 돌리는 단체들이 한 둘이 아니라니 ‘누구를 위한 첨단 시설’인지 의아해진다.
한국에서 노인 복지향상을 위해 실버타운을 만들었다지만 월 이용료가 수백만원까지 해 일정한 수입원이 없는 노인들을 씁쓸하게 한다면 실버타운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또 장애인들의 문화생활을 도우려 음향장치, 넓은 좌석, 편안한 화장실 등을 구비해 놓았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해도 출입문에 휠체어 탄 장애인 진입로를 만들어놓지 않았다면 설움을 키울 뿐이다.
“교육원 유지비를 임대 수입과 대관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어쩔 수 없다”는 게 교육원 측의 입장이지만 개원 전에 다른 재원을 확보해 한인들이 어려움 없이 시설을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어야 마땅하다. 무료 개방할 경우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들어 물을 흐려놓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음직도 하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의욕이 강하고 순수한 문화활동을 하면서도 돈이 없어 그 열기를 발산할 곳을 찾지 못해 헤맨다면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다.
경기장에는 관중이 가득해야 하며 장터에는 사람이 몰려야 제 격이듯 교육원에는 우리 문화와 언어에 대한 배움의 갈증을 풀려는 발길이 부산하고 시끌벅적 해야 한다. 교육원은 정적이 흐르는 도서관 열람실도, 장례식 끝난 장의사도 아니다. 자료실에 보관된 책과 시청각 자료가 인력 및 준비 부족으로 낮잠을 자고 있다니 한 푼 두 푼 성금을 낸 한인들은 답답하다.
미국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려는 재단측의 계획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미정부 지원을 따내려면 실적을 쌓아야 하고 이는 한인들이 교육원을 자주 애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지금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교육원이 아니라 아이들 손잡고 내 집 드나들 듯 친근한 마음이 들도록 해야 한다.
국회에 계류중인 예산 지원안이 통과되면 내년부터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하지만 돈이 능사가 아니다. 교육원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관계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 ‘하얀 코끼리’가 아니라 ‘민족교육의 시금석’으로 자리매김 하길 바란다.
박 봉 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