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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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불리기’ 대신 ‘정책’으로 지지 유도하라

2002-09-2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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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후보 후원회가 할 일


한국 제 16대 대통령 선거일이 85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회창, 정몽준, 노무현 후보가 각축을 벌이고 있으니 미주 한인사회라고 잠잠할 리 없다. 후원회마다 지지 후보 띄우기에 바쁘다. 하지만 학연, 지연, 친분으로 얽어지는 등 전근대적인 모습을 탈피하지 못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정책비교를 통해 후보를 지지하고 홍보하는 ‘개혁 마인드’가 요구된다.

이회창씨와 이인제씨가 각각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거론되던 지난해 한인사회의 한 인사는 이번 기회에 한몫 잡을 심산으로 후원금 낼 곳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여론조사 인기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터라 이회창씨측에 2만 달러, 이인제씨측에 1만 달러를 할당하며 양다리를 걸쳤다. 낚시 밥을 걸어놓고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본전을 뽑는 것은 물론 ‘플러스 알파’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후원회 활동에 관여했던 한인의 전언이다.

다른 한인은 이인제씨 경선 당시 눈 도장 찍으러 한국에 가 수천 달러를 기부금으로 냈다. 속사정을 잘 아는 후원회 관계자는 “이인제씨가 승리할 것으로 여겼다가 낙마하는 것을 보고는 괜히 돈만 날렸다며 아쉬워하더라”고 했다. 후보의 정책을 지지해서라기보다 이런 저런 연줄을 이용해 이름 내고 이권을 따내려다 헛물만 켰다는 것이다.


지금은 판세가 바뀌어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의 3파전 양상을 띄고 있고 후원회들은 “과거와 다른 후원활동”을 다짐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게 중론이다. 우선 ‘세 불리기’에 너무 집착해 있다. 한 후원회는 현재 수백 명 정도의 회원을 11월께 수천 명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한 표를 부탁하는 ‘전화부대’로서 혹 그 기능성을 따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편가르기로 한인사회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시각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대선 후보들은 미주한인사회에서의 모금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한다. 이곳에서 거둬봐야 ‘푼돈’이고 공연히 잡음만 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모금보다는 세 확장에 중점이 두어진다. 한 후원회는 자발적 헌금 외에는 후원금을 걷지 않는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회원확충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후원회가 생기는 것도 기현상은 아니지만 “무엇 때문에 머릿수 늘리는 데 열을 올리는가” 자문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틈만 나면 2세들에게 “본국에 기웃거릴 생각 말고 주류사회 진출에 전념하라”고 되풀이하던 1세들이다. 그런데 후원 명목으로 한국정치를 놓고 미덥지 못한 세 싸움을 한다면 부끄러운 어른이 되는 것이다.

회원 늘리기에 치중하다보니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사공이 많아진다. 한 후원회는 회장이 3명이다. 처음에는 한 명이었지만 타운의 ‘명망가’를 영입하기 위해 회장자리를 건 것이다. 옛 왕들이 세력기반을 다지고 넓히기 위해 지방 호족들에게 관직을 준 것이나 매한가지다. 복잡한 한국도 아니고 한인사회에서 후원회장이 여럿 있어야 하는지 갸우뚱해진다.

엇나간 세 다툼은 ‘이름 도용’을 낳는다. 한 후원회 회장은 “최근 한인 단체장 등 약 15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들은 한 후원단체가 언론광고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멋대로 후원자 명단에 올려놓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전했다. 한인사회에서 이름 깨나 알려진 인사들의 명단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문지상에 공개하는 것은 파렴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아직 공식 후원회는 아니지만 언제든지 기존후원회에 합류하거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또 다른 단체는 간부직을 수백 달러씩에 팔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돈을 받고 자리를 파는 사람도 그렇지만 대단한 감투인양 돈주고 사는 사람도 조소거리다. 당장 시정돼야할 파행이 아닐 수 없다.

“상대 비방광고, 밥만 먹는 후원행사 등을 지양하고 후보의 이미지 업(up)을 지향하겠다”는 한 후원회 관계자의 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미흡하다. 후원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후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선행돼야 한다. 후원회는 그저 골목대장을 따라 줄서는 단체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대통령 되면 그만이다”고 한다면 21세기가 아니라 20세기를 사는 미주한인이다.

후원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한국의 발전’과 ‘해외한인의 위상 제고’를 함께 직시해야 한다. 후보의 정책을 비교하고 상대적 우위를 설득력 있게 밝혀야 한다. ‘새 시대, 새 정치’ 등 두루뭉실한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부패척결, 환경문제, 빈부격차, 주택난, 교통난, 의약분업, 노동자 권익 등 국내이슈에서 북한,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국가들과의 외교정책, 동북아 물류 중심지로의 구상 등 구체적인 정책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진정으로 한국을 성장시킬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홍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지후보 찬양 일변도의 모임은 ‘자식 자랑하는 부모’처럼 비쳐질 뿐이다. 지지후보라도 후보의 장단점을 면밀히 분석해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본국에 진언해 시정 보완될 수 있도록 건설적인 후원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을 위한 것이고 해외한인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다.


커뮤니티 차원에서 한인들의 권익신장에도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일례로, “미국에서 출생했어도 부모가 시민권을 취득하기 전에 태어났으면 혈통주의에 의거해 병역의무를 진다”는 법규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를 지적하고 이를 시정하도록 본국 대선후보측에 강력히 요구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본국 정치현상에 곁가지로 머물 게 아니라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교포들에 투표권을 부여하는 ‘글로벌 입법’도 추진해 볼 수 있다. 후보 홍보에 그칠 게 아니라 세미나를 개최해 커뮤니티의 바램을 청취한 뒤 후보의 교포정책 입안과정에 반영토록 하는 도전적 자세가 요구된다.

새 대통령이 선출된 뒤에도 공약을 준수하는지를 주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후원회가 일회성 모임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새 정부의 교포관련 정책을 주시하고 한인사회 입장을 지속적으로 입력할 계획”이라는 한 후원회 실무자의 말이 대선 후보 후원회가 전향적으로 변화하는 데 촉매제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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