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덕목은 여러 가지다. 통찰력·비전·용기·청렴·정직·겸손에, 요즘에는 민주성까지- 헤아리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통칭 전인적 인격체라 말할 수 있겠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인물이 존재할 수 있을지는 극히 의문이다. 아마도 절반의 항목만 갖춰도 “괜찮은 지도자”로 평가받을 만하다.
요즘 여의도 국회 의사당의 국정감사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4년반 통치를 놓고 설왕설래 중이다. “수평적 민주정부를 세웠다”며 헌정사 최고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호언한 DJ-이제 임기를 불과 다섯 달을 남겨 놓은 지금, 과연 그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어떤 것일까? 집권 민주당은 “세종대왕 이후 성군”이라는 입에 발린 ‘찬양론’을 외치고 있다. 민주화 정착, IMF 위기를 극복한 경제정책 성공, 민족 염원인 남북화해 달성 등에 그 근거를 둔다. 반대로 “대통령이 돼선 안될 사람”이라는 야당의 ‘혹평’은 그 현란한 찬사의 용어들을 깡그리 뭉갠다. 민주화의 출발은 기실 DJ 자신의 “행동하는 욕심”이었고, IMF 극복은 전임정권(김영삼 정권 제외)과 국민이 쌓은 경제적 기초가 튼튼했기 때문이며, 돈을 퍼준 대가로 일시적 화해는 얻어냈지만 김정일 정권을 연명시켜 오히려 통일을 멀게만 했다는 것이다.
여야간 공방을 떠나 국민들은 각자 의 잣대로 과연 DJ가 국가 통치자로서 제대로 일을 하고 처신을 했는가를 하나하나 짚고 있다. 객관적인 지표는 여론조사로 나타난다. 올 들어 내내 국민의 지지도(여론)가 20% 주변을 맴돌고 있음은 국민 다수가 찬양론을 외면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정권의 부정비리가 연일 터져 나온 판이니 용비어천가를 불러댄들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은퇴 후 기거할 DJ 본가와 세 아들들의 집이 무려 100억원대의 초호화판이라는 야당 폭로 내용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더라도 민초들 마음속엔 야속함과 괘씸함과 분노가 물결침이 분명하다. “국가 정상에 오른 것으로써 생애 최고의 영광으로 만족한 채 청렴하고 청빈한 노후를 보내면 됐지, 꼭 아방궁처럼 꾸미고 살아 무엇하겠는가. 그래 가지고서야 백성들로부터 존경ㄴ을 받는 지도자가 되겠는가”하는 심사들인 것이다.
DJ와 김정일의 ‘55분 차안 밀담‘ 진상은?
또 한편으로는 국가 통치자로서의 DJ의 자질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소리도 적지 않게 들린다. 요즘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중에는 매우 흥미로운 것도 있다. 2000년 5월, DJ가 평양 땅을 밟을 당시의 이야기다. 순안공항에 내려 예정에 없던 김정일의 공항 영접을 받은 DJ는 의전 절차를 짧게 마치고 김정일과 함께 링컨 콘티넨탈 차에 올랐다. 김정일은 왼쪽, DJ는 오른쪽에 앉아 공항에서 백화원 초대소까지 함께 갔다. 거리는 약 34킬로. 한데 승차시간은 55분이나 걸린 것으로 돼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주행했음이 분명하다. 그게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이 때 우리 경호원이나 수행비서가 단 한 사람도 동승하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따라서 그가 차안에 있던 55분 동안 국가비상 통신망은 완전 단절돼 있었다. ‘주적 관계’ 혹은 ‘잠재적 적’ 진영에 들어간 대한민국의 군 최고 통수권자가 근 한시간 동안 스스로를 무방비 상태로 몰아넣은 셈이다.
국가 원수가 외국을 방문할 때는 의전문제를 미리 정하게 돼 있다. 국회에서 밝혀진 데 따르면 DJ의 ‘나 홀로’ 승차는 그런 협의조차 없는, 김정일의 깜짝 제의로 일어난 돌발사태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북의 통 큰 지도자”(DJ평)의 손에 끌려 적장의 자동차에 서둘러 올라탔다는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과연 두 사람간에 오간 대화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데 아무도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듣지 못했다. 양 김씨 중 누구도 그 때 밀담을 입도 벙긋하지 않아 밀담은 흑막의 베일에 싸여 있다. 정가에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주한미군 문제와 국가보안법 처리 같은 미묘한 안건에 대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라느니, 미국에 관한 고도의 정보교환이 있었다느니, 대북 지원에 관한 모종 거래가 있었다느니 하는 확인 불능의 추측만 난무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DJ가 김정일과의 한 시간 밀담을 국민에게 지금까지 알리지 않은 것은 매우 잘못된 행위다. 그의 방북은 개인 김대중이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면 DJ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국민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 이를 외면한 것은 직무유기다. 국민을 우습게 본다는 비난도 들을 만하다. 미국 같으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밀담을 비밀에 부친 채 버틸 수 있을까. 당장 공개가 어려운 내용이라면 국가 통치사료에라도 기록을 남겨 놓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조치를 취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DJ 개인과 햇볕정책에 대한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 것도 그런 식의 ‘위험한 통치’에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