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꼼수의 끝

2002-07-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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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봉 현 <편집위원>

동독 주민들의 계속적인 서독으로의 탈출은 공산당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에게는 눈뜨고 못 볼 광경이었다. 1956년부터 1957년 사이에 수천 명이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더 늦기 전에 더 이상의 탈출을 막아야 할 처지였다.

마침 헝가리는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국민들로 혁명 분위기에 휩싸였다. 묘안을 찾고 있던 울브리히트는 당 간부회의에서 손뼉을 치며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헝가리 민주화 혁명에 소련이 무력개입하자 서베를린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었다.

동독 지도부는 동베를린 주재 소련대사 푸시킨에게 서베를린을 기습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울브리히트의 계획은 이러했다. 소련의 헝가리사태 개입에 반발하는 서독 주민들이 서베를린에서 시위를 벌이면 군중 속에 동독 비밀경찰이나 보안요원, 또는 하수인들을 시위대에 섞어 놓는다.


시위대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 집결한 뒤,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동베를린의 소련대사관을 향해 행진한다. 동독의 프락치들이 소련 대사관에 돌을 던지고 창문을 부순다. 성난 군중이 박수를 치고 일부는 폭력에 가세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상태로 빠져 들어간다.

소련 대사관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되면 소련과 동독은 자위권 발동이란 명분으로 서 베를린에 군대를 파견해 자연스럽게 베를린의 서쪽을 점령한다는 복안이었다. 이 계획은 1956년 소련군의 헝가리 의거 무력진압으로 비롯된 지극히 혼란스런 상황을 이용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울브리히트의 이 계획은 소련의 반대로 무산됐다.

후르시초프에게 울브리히티의 구상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자칫하면 미-소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섬뜩한 발상에 후르시초프가 동조할 리 없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울브리히티는 1957년 초 유사한 계획을 소련 측에 건넸으나 반응은 냉랭했다.

울브리히티의 시대착오적인 구상은 두고두고 문제가 됐고 결국 맹방 소련의 미움을 사 훗날 실각의 단초가 됐다. 눈앞의 이익을 좇으려 내 놓은 터무니없는 해법이 그를 권좌에서 쫓아낸 셈이다. 개혁으로 민심을 얻어 정권을 탄탄히 할 생각을 하지 않고 비정상정인 얕은꾀를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엔론, 월드컴 등 거대기업들이 투자자들의 돈을 대거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해 욱일승천의 기세로 으스대다, 저마다 장부조작으로 수익을 부풀렸음이 탄로 나면서 땅 끝까지 추락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장사해 차근차근 올라갈 생각하지 않고 한탕 치고 매끄럽게 빠지려다 나락으로 미끄러진 것이다.

비단 공개리에 망신당한 몇몇 기업뿐 아니다. 거의 대다수 기업들이 크고 작은 비리와 부정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준법과 기업윤리는 온데간데없고 탈법과 썩은 관행이 판을 쳤다.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지적대로 사방에 탐욕의 기회가 널려있다는 ‘환경책임론’에 수긍이 간다. 기업의 부정을 알고서도 호황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까 쉬쉬해 온 미디어에 문제가 있다는 ‘언론책임론’도 그럴듯하다. 떡고물에 홀린 소위 전문가들이 거짓 정보와 분석으로 일반 투자자들을 현혹했다는 ‘월가공모론’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비리와 부정의 한가운데는 그 당사자들이 서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은 파렴치범이다. 제 살 궁리는 다 해놓고 순진한 직원, 투자자, 관련 업계종사자들에게 피해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어류나 오징어류 등에 달라붙어 살이나 내장을 녹여 파먹고 뼈만 앙상하게 남겨 죽이는 기생성 먹장어와 다를 바 없다.

이 뿐 아니다. 가장 신뢰할만한 사회를 신뢰하기 힘든 사회로 뒤집어 버렸다. 믿음을 주지 못하는 사회는 이기주의를 배태한다. 서로를 의심하게 되니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보다 강해진다.

개방화 세계화 시대라지만 실지로 개개인의 마음은 자꾸만 오그라들게 된다. 사라진 돈은 다시 벌어 봉창할 수 있지만 조각난 신뢰는 간단히 복원되지 않는다. 기업비리 장본인들의 못난 짓이 사회 전반에 가져 올 수 있는 해악이다. 파장을 고려하면 흉기든 강도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고도 할 수 있다.

여유 부리며 미적미적하던 부시행정부가 여론의 질타를 받자 뒤늦게 수습책을 마련한다고 법석이다. 기업가 출신들이 대통령과 요직에 포진돼 있는 현 행정부가 과연 상처입고 떠난 마음들을 얼마나 돌려놓을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기업들과의 커넥션 때문에 얕은꾀를 부렸다간 뒤틀린 현실을 바로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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