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햇볕’의 값비싼 대가

2002-07-1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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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서울에선

▶ 안영모<언론인>

김대중 대통령(DJ)의 햇볕정책은 침몰했다. DJ가 지극정성으로 도움의 손길을 준 ‘신뢰할만한 지도자 동무’의 지휘하에 있는 북한 해군의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포격을 받고 서해바다 깊숙이 가라앉았다.

햇볕정책은 DJ정권의 브랜드다. 지난 4년반 동안 이 정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왔다. 개인적으로는 소득도 컸다. 한 때 나마 남북 화해를 이룩해 생애 최고의 영광을 손에 쥐었다. 바로 노벨 평화상이다. DJ가 따듯한 햇볕을 조사(照射)하지 않았던들 북의 김정일이 그를 평양에 부르지 않았을 것이며, 그랬다면 그 영광의 수상자는 다른 얼굴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명운을 건 햇볕정책, 그런 까닭에 DJ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말 그대로 아낌없이 주었다. 김정일이 가장 두려워했던 독일식 통일, 즉 흡수통일 같은 일일랑 “걱정 붙들어 매라”고 안심시켰다. 먹을 것(식량) 입을 것을 후하게 주었다.


김정일의 일인 통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달러도 분에 넘게 건넸다. 얼마를 전했을까? 그건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다만 공개된 것만 쳐도 매일(매월이 아니다) 50만달러가 김정일의 금고로 들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도 그 엄청난 돈은 넘어갔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 경비조로 2003년까지 지불해야할 9억3천 만달러를 하루 단위로 계산한 액수다.

초기엔 현대의 정주영 돈이 들어갔지만 지금은 현대해상이 거덜나 경비 절반을 나라 예산으로 보충해 주고 있다. 우리 형편에 이 정도면 무리한 지원이다. 하지만 DJ는 눈 딱 감고 산타클로스가 됐다. 어디 그 돈뿐이겠는가. 종종 국회에선 DJ정권의 대북 퍼주기가 논란을 일으킨 점을 감안하면 돈 보따리 부피는 좀 더 클 것 같다.

DJ는 독재자로 각인된 김정일의 얼굴을 천사로 분장해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워싱턴에 와선 부시의 고약한 언사(DJ를 향한 “저 노인장 운운”)를 들어가면서까지 햇볕과 김정일 PR에 열심이었다. 그 정도라면 김정일로선 당연히 “형님, 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하고 남쪽으로 향한 총부리를 거두고 경제 살리기에나 전념했어야 옳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짓을 꾸몄다.

DJ라는 고마운 은인의 뺨을 세차게 갈긴 것이다. 혹자는 “무슨 그런 비약이 있는가, 서해교전은 군부 강경파 짓이지’ 김정일 지시에 따라 의도적으로 감행했다는 증거가 없지 않은가?”고 힐난할지 모른다.

하지만 북한의 노동신문과 TV방송, 아니 평양 발 외신을 조금이라도 보고들은 사람이라면 그 유식한 척하는 반문은 낯부끄러워 하지 못할 것이다. 북한에 무슨 강경파와 온건파가 존재하는가? 쌍둥이 6남매가 출생해도 ‘지도자동지의 은혜’요, 쌀 몇 마지기 더 추수해도 ‘지도자 동지의 영명함’을 찬양하는 현대판 왕조, 오로지 절대 권력자만 존재하는 그 곳에서 남측과의 교전이라는 중대 안보문제를 지도자 동지 몰래 군부의 강경파들이 꾸몄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럼에도 DJ의 핵심참모들은 그 유식한 척하는 이들과 함께 ‘서해교전은 우발적인 충돌’이라며 사태를 축소했다. 하기야 DJ로선 낙심 천만일 것이다.
“아니 내가 그처럼 잘 대해 준 김 위원장이 왜 이럴까? 내 사정은 하나도 안 봐주긴가?” 그 섭섭함이 실로 클 것이다. 그리고 교전사태를 김정일 짓으로 인정할 경우 자신이 딜레마에 빠지는 우를 범하는 꼴이다. 그러니 아니라고 부인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왜 배은망덕한 일을 벌였을까?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남측의 월드컵 성공에 배가 아프고, 대선 정국을 휘젓고…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하고도 심각한 사유가 있다. DJ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다.


“약속을 지켜라!”. 김정일은 레임덕에다 아들 문제로 허덕이는 DJ의 궁핍한 사정은 모른 척, 개성 공단과 전력공급 등 경제지원 약속은 어찌됐으며 보안법을 폐지하겠다던 내면 약속 또한 휴지로 만들 생각인가를 묻고 있다. “나를 팔아 노벨상을 탔으면 약속한 대가는 지불해야할 것이 아니냐”고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쪽은 DJ와 그 휘하의 햇볕정책 추진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하든 김정일의 심기를 다독여 분란을 일으키지 말도록 통사정해야할 입장이다.

북-미 회담을 무기 연기시킨 워싱턴에 “우발적 충돌이니 예정대로 나가달라”고 했다가 면박을 받은 일이나, 일부 매체가 “서해교전은 어로 선을 넘어 조업한 우리 어민의 월경 때문”이라고 당치도 않은 왜곡보도를 한 사실 등이 이를 반증한다.

월드컵을 통해 ‘하나’가 된 국민이 서해교전으로 다시 갈라 서 삿대질을 하고 있음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북측 해군이 우리 해군을 덮쳐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우리 함정이 격침됐다는 명백한 사실을 이리저리 돌려 해석하는 DJ정권의 행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를 문제삼음은 정쟁이나 트집이 아니다. 보통의 ‘상식인’으로서 당당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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