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나는 평양을 둘러보았다. ‘악의 축’에 대해 말은 많지만 실제 이들의 실상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 듯해서다. 지난 96년 이라크를 방문했었고 지난 10년간 수차례 이란을 왕래했지만 이들과 같이 악의 축에 끼인 북한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우리는 미국일행은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도중에 차에서 내려 거대한 김일성 동상 앞에 헌화하고 묵념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4박5일 일정의 북한방문이 시작됐다.
북한을 가장 정확히 묘사하는 것은 서울에 온 망명자나 중국 북부지역에 숨어사는 탈북자들의 입을 통해서다. 북한은 정부 통제가 워낙 심해 정부의 눈에 거슬리는 것을 일반인들이 알 방도가 없다. 이는 이라크, 이란과 다른 점이다. 평양의 첫 밤, 시내를 걸어 다녔다.
우리는 호텔에서 나와 왼쪽으로 간 뒤 죽 길 아래로 갔다. 지하도로 길을 건넜다. 그게 도보여행의 끝이었다. 길 중간쯤 갔을 때 한 안내원이 내게 비디오를 너무 많이 찍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안내원과 함께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나는 아침에 조깅을 하길 원한다고 안내원에게 말했다. 안내원들은 조깅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 고집했다.
나는 LA에 살고 있으며 매일 조깅을 한다. 나는 이라크에서도 이란에서도 조깅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악의 축인 북한을 알려면 조깅을 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안내원들은 마침내 승낙했다. 아침 6시 호텔 로비에서 나와 만나자고 약속하고 떠났다. 다음날 아침 약속대로 그들은 왔다. 그들은 호텔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나는 2개의 신호등 사이를 왕복 달리기를 했다.
내가 캘리포니아 주교도소를 취재하던 중 죄수들이 교도소 마당에서 의무적으로 운동하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조깅이었다. 내가 교도소에 수감된 느낌이었지만 북한에서는 정상처럼 여겨졌다.
이란에는 조깅코스가 많이 있다. 하지만 10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헐렁한 긴 바지(스웨트 팬츠)를 입고 뛰어야 했으며, 여자 동료는 이란 법규에 따라 스웨트 팬츠를 입지 못하게 돼 있어 조깅도 못했다. 이라크에서는 조깅 복장은 자유롭다. 남녀 모두 함께 뛸 수 있다.
북한은 주민의 생활을 철저히 통제됐다. 일례로 호텔 밤에 있는 라디오는 다이얼이 대신 버튼으로 주파수를 조절한다. 다이얼로 하면 한국 방송을 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튼은 단 하나만 작동됐다. 동행한 한인 동료는 “어느날 밤에 라디오를 들으니 아나운서가 지금 평양에 외국인들이 와 있으니 이들과 대화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더라”고 전했다.
평양은 매우 빈곤했다. 거리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중국과도 대조적이었다. 다만 자전거가 종종 다닐 정도였다. 사람들은 걸어 다녔다. 밤에는 전기가 끊기기 때문에 시의 대부분이 깜깜했다. 시골에서는 농부들이 소와 쟁기로 농사를 지었고 도로와 다리를 손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도랑물을 마셨고 식량 대용으로 야생 식물들을 캐먹었다. 이같은 광경은 촬영이 금지됐다. 그런데 3명의 안내원 모두 점심 때 맥주를 마신 뒤 잠이 든 사이 차안에서 창문을 통해 시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좀 더 흥미로울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김일성에 대한 것은 많이 보았다. 그의 생가, 실물크기의 동상 등등. 또 수만명이 보여주는 매스게임을 북한의 입장에서는 진정 인상적이었음을 인정한다. 나는 개고기도 먹었다. 그리고 안내원들과도 친해졌다. 그들은 “경찰국가에 살면 억압적인 안내원 같은 직업을 갖는 게 아주 나쁜 일은 아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북경행 비행기에 탔을 때 나는 ‘자유 국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북한정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는 부시가 갖고 있는 분노와 관계없이 ‘악의 축’ 국가들은 모두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남북통일이 아니라 한국이 어떻게 그 부담을 지느냐 하는 문제다.
북한은 이라크와 이란에 미사일을 팔아 외화를 벌고 있다고들 한다. 이들 3개국은 우리와 우리의 우방국을 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다. 같은 조건이지만 우리와 무역거래를 갖고 있는 중국은 예외다. ‘악의 축’은 미국과 무역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주시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북한 방문 중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 해도 방도가 없는 게 안타깝다. 인터넷 시대에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