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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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보다 무서운 것

2001-09-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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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봉현 편집위원

테러는 가히 위력적이다. 경제를 망가뜨리고, 사회를 뒤숭숭하게 하고,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다. 큰 줄기만 보았을 때 그렇고 곁가지까지 들춘다면 그 폐해를 형언하기 힘들다.

테러 현장은 지옥을 연상케 하고 피해자의 처지는 참담하다. 테러리스트는 악마에 비견되고 그 배후는 사람의 탈을 쓴 동물로 낙인이 찍힌다. 그래서 뉴욕 테러사건은 ‘악의 서열’ 꼭대기에 올랐다. 테러만큼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테러보다 무서운 것이 딱 하나 있다. 이는 테러를 당한 사회에 찾아올지 모를 불청객이다. 테러는 요란하지만 이것은 조용히 접근한다. 테러가 ‘얼굴 없는 적’에 비유되지만 이것에 비하면 한층 가시적이다. 서로 으르렁대다가도 테러를 당하면 하나로 뭉치게 되지만 이것은 단단한 찰흙 덩어리도 모래처럼 흩뜨린다. 테러보다 힘센 이것은 다름 아닌 분열이다.


분열은 갖고 있던 것을 가차없이 빼앗는다. 파리 시민의 보수성향에도 불구하고 올 봄 실시된 시장선거에서 좌파 사회당이 130년 만에 처음으로 시청을 차지하게 된 것은 우파 공화국연합의 집안싸움 때문이었다. 공화국연합이 필립 세갱을 후보로 내세우자, 장 티베르 전 시장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우파 지지자의 표를 잠식했고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분열은 한 나라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을 수도 있다. 지난해 대만 총통 선거에 민진당 후보로 출마한 천수이벤이 국민당의 반세기 집권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한 것도 국민당의 분열이었다. 국민당 단일후보 롄잔에 반기를 든 쑹추위가 무소속으로 출마함으로써 천수이벤에 승리를 안겨준 것이다.

분열이 극에 달하면 불행의 역사가 점철된다. 2,000만명이 넘는 쿠르드족은 고유 언어에 4,000년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독립국가 수립에 실패했다. 부족간 반목이 심해 1차대전 후엔 영국, 2차대전 후엔 소련 등 강대국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최근엔 친 터키파와 친 이라크파로 나뉘어 유혈충돌까지 벌였다.

분열은 반드시 이견의 산물은 아니다. 다양한 목소리는 오히려 사회의 역동성을 살린다. ‘소수’를 힘으로 내리누르는 데서 분열의 씨가 배태된다. 미국사회는 ‘소수’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정신으로 저력을 발휘해 왔다. 헌데 테러사건 이후 이 다양성을 훼손시키는 움직임이 조금씩 불거지고 있다.

부시 대통령에 무력사용 권한을 부여한 결의안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바바라 리 연방하원 의원이 표결 후 전화와 이메일에 쇄도하는 살해위협으로 특별경호까지 받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박수갈채를 받은 "우리편이 아니면 적"이란 표현도 ‘제로 섬 사고’를 부채질하고 있다.

아무런 잘못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그룹이 있다면 화합에 금이 갈 수 있다. 테러가 발생한 첫 일주일간 캘리포니아주에서만 5세 아동이 유치원에서 위협을 당하는 등 아랍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70여건 발생했다. LA시는 증오범죄가 평소보다 3배나 증가했다. 세금 꼬박꼬박 내며 성실히 사는 이민자들이 단지 아랍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공항 등에서 아랍계 등 소수계를 표적 단속하는 사례가 빈발해 이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보수파들은 언론을 통해 차제에 중동이나 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민자를 더 이상 받지 말자는 주장을 펴며, 보복행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미국민이 아니라는 선동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주 150개 대학에서 8,000여명이 반전시위를 했다. 대다수 미국민이 보복결의에 찬 상태라 다소 일찍 튀어나온 감이 있지만, 앞으로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화되고 희생자가 속출하면 이 같은 물결이 거세질 수 있다. "전쟁을 지지하면 애국자이고 반대하면 비애국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화합을 깬다.

’소수’를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분열을 부를 수 있다. 다양성을 잘 녹여 핵융합과 같은 폭발력을 내온 미국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심히 우려한 ‘다수의 독선’이 미국을 갈라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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