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사관과 국정감사반

2001-09-1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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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고

▶ 박봉현 편집위원

장학사가 학사검열을 위해 초등학교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교장에서부터 말단 교사, 그리고 학생들까지 온통 벌집 쑤셔놓은 듯 부산해진다. 교장은 장학사에게 나쁜 점수를 받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쓴다. 교육자로서 분에 넘치는 향응을 베풀지는 않더라도 예우를 극진히 한다.

교사들은 장학사보다 교장을 더 의식한다. 만일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학급에서 지적사항이 나오면 장학사가 떠난 뒤 두고두고 교장에게 핀잔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학생들이 편할 리 없다. 장학사가 갑자기 각 학급에 들이닥칠 것에 대비해 실내정돈을 한다.

특히 교실 뒤쪽에 있는 작은 칠판이 환경미화의 체크 포인트다. 글씨 잘 쓰는 학생이 국어, 산수, 사회, 자연 등 학습내용을 정리한다. 총천연색 분필로 잔뜩 멋을 부린다. 하지만 내용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담임교사가 대충 하길 원했고, 장학사가 보기에 예쁘고 가지런해 보이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장학사도 칠판 내용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파랑, 초록, 분홍, 노랑, 검정이 칠판에 현란하기만 하면 무사통과다. 별 일 없이 장학사가 떠났다고 하면 모두들 안도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몸에 조금씩 밴 ‘적당주의’의 일단이다.

미주지역 국정감사를 하고 있는 한국 국회 감사반이 다음주 LA 총영사관에 들른다. 감사반은 영사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게 된다. 정식 감사는 아니지만 영사관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에 대해 브리핑을 받고 질의하게 된다.

여야의원 7명으로 구성된 감사반은 영사관이 한인사회와 관련된 일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궁금하거나 의심나는 부분이 돌출하면 캐물어야 한다. 정식 감사는 아니지만 영사관에서 폼 한번 잡아보고 대충 넘어가는 자리도 아니다.

90년대 중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한 의원이 영사관 감사에 동참했었다. 이 의원은 인사말 한마디하고는 감사가 열린 오전 내내 함구했다. 같은 여당이라 감싸주기 위한 것처럼 비쳐졌다. 야당의원들은 총영사와 담당 영사들에게 날카로운 질문공세를 폈지만 이 의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에 김 전대통령의 좌우명인 ‘대도무문’을 한자로 쓸 뿐이었다. 감사는 안중에 없고 고국에 있는 보스 생각만 하는 모양이었다.

정식 감사가 아니더라도 감사반은 귀국 후 사안에 따라 의정활동에 참고해야 한다. 멕시코 대통령이 미국에 불법체류하고 있는 자국민의 권익증진을 위해 부시 대통령에게 대책을 강구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 것은 되새길 만하다. 미주 한인들의 권익 문제가 대두하면 "외교적 마찰 우려" 운운하며 미온적인 입장을 보여온 정부의 태도가 세계화 시대에 걸맞지 않음을 지적해야 한다.

이번 업무보고에서는 남북 화해와 맞물린 보수·진보세력 갈등, 평통 인선 잡음, LA 한국교육원 건립 지연 등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여럿 있다. 의원들은 이같은 한인사회의 현안에 대해 사전지식을 가져야 한다. 영사관을 목 축이려 잠깐 거쳐가는 주막쯤으로 여긴다면 의원으로서의 소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영사관 직원들에게 의원배지 자랑할 심산이라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해가면서까지 LA에 올 이유도 없다.

영사관은 감사반의 방문 목적에 대해 "감사가 아니라 단순 업무보고"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두루뭉실 ‘시간 때우기’로 임해서는 안될 것이다. 영사관으로서는 감사와 업무보고에 큰 차이를 두고 싶을지 모르지만, 한인들에게 그 차이는 관심사가 아니다.

영사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를 진솔하게 정리해 보고해야 한다. 실태를 제대로 알리고 의원들의 도움이 필요하면 당당히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영사관 업무보고는 골치 아픈 일을 덮어둔 채 슬쩍 넘어가는 통과의례가 아니다. 영사관이 한인사회와 얼마나 가까운 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영사관과 감사반의 자세를 한인사회가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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