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회보장제도 존속돼야 한다

2001-06-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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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시각

▶ 로버트 라이시 <전 노동부장관, LA타임스>

워싱턴에서 ‘실언’은 고위관리가 자신의 속마음을 실수로 내비치는 경우를 일컫는다. 부시 행정부 관리들은 모두가 각본에 짜여진 대로 말을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실언이 나온 경우는 별로 없지만 폴 오닐 재무장관만은 예외다. 오닐 장관의 실언을 듣고 있노라면 현재 미국을 운영하고 있는 ‘부시 기업’의 진정한 경영철학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다.

오닐 장관의 가장 최근 실언은 ‘왜 정부가 소셜시큐리티, 메디케어 기타 사회보장 혜택을 제공해야 하는가’를 이슈로 한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오닐 장관은 "신체가 멀쩡한 성인이라면 스스로 은퇴기금과 의료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분한 저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닐 장관의 솔직한 답변은 왜 부시 행정부가 베이비 부머들이 은퇴 연령이 돼서 소셜시큐리티와 메디케어 기금이 바닥날 것에 대해 전혀 걱정을 하지 않은 채 1조3,000억달러라는 막대한 감세 계획-그 혜택의 대부분은 오닐과 같은 백만장자에게 돌아가게 돼 있는-을 추진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부시 기업은 베이비붐 세대들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오닐의 솔직함은 칭찬할 만하다. 그 덕분에 민주당은 2002년 중간선거와 2004년 대선에서 노인층 표를 싹쓸이할 수 있게 됐다. 오닐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왜 사회보장 제도가 필요한가-를 이슈화시켰다. 소셜시큐리티의 개념은 지난 1935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 프랜시스 퍼킨스 노동장관에 의해 추진됐다. 실업수당과 웰페어가 포함돼 있었고 메디케어는 그보다 30년 후 존슨 대통령에 의해 추가됐다.

사회보장은 대공황, 세계 2차대전, 냉전시대와 몇차례 침체기를 겪은 세대들에게는 잘 이해되고 있는 개념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뚜렷한 잘못이 없는 가정도 사회의 밑바닥에 떨어지게 되고 무일푼으로 전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가장이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된다. 가장이 죽거나 불구가 되면 남은 가족의 신세는 정말 비참해진다.

인간적인 사회란 이같은 곤경에 처한 이웃을 십시일반으로 돕는 사회다. 사회보장제도 하에서는 다른 보험제도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소액의 보험료를 납부한다. 일반 보험과 다른 점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모든 국민이 가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 건강한 자나 아픈 자, 노인이나 젊은이를 막론하고 말이다.

오닐 장관은 개인이 저축을 하든가 아니면 사설보험에 가입해야만 했던 소셜시큐리티 제도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가족은 아무리 노력해도 저축을 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질병, 사고, 직장폐업, 주식시장 붕괴는 인력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사설보험은 보험금 지급 확률이 낮은 사람들만을 골라서 가입을 받는다. 보험회사나 HMO가 자선단체가 아니고 이윤을 내야 하는 영리단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보장제도가 없으면 가난한 사람들, 위험도가 높은 사람들은 좋지 않은 일이 닥쳐도 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반면 돈이 많고 위험도가 낮은 사람들은 자기네끼리 보험풀을 만듦으로써 낮은 보험료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래서 부자, 건강한 자, 젊은 사람, 교육을 받은 자, 끈이 있는 자와 그 가족들은 점점 나은 생활을 누리게 된다. 그들과 가난한 자들과의 간격은 점점 벌어져만 간다. 소득과 부의 간격만은 아니다. 지리적인 간격도 점점 벌어져 서로 사는 동네가 멀어지고 있다. 심리적인 간격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자들은 못 사는 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보지도 않는다.

1935년에 설립된 소셜시큐리티에 의한 ‘사회적 안전보장’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옛날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었지만 지금은 그같은 공동체 개념이 사라졌다. 오닐 장관과 그의 행정부는 미래의 미국사회가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대로라면 미래에는 사회라는 개념조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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