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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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마술사

2001-06-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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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시각

▶ 로버트 보로세이지 <워싱턴포스트 기고>

정치란 마술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눈을 어디로 쏠리게 만드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마술사가 원하는 곳에 눈길을 주었다가 속아넘어가는 것처럼 정치인이 원하는 곳에 관심을 쏟았다가 진실을 간과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새로 상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부시 대통령의 세금 삭감안에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적극적인 위원회 활동을 펼쳐야 한다. 부시가 주장하는 것처럼 세금삭감이 "써야할 곳에 다 쓰고도 남는 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여부를 확인하자는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부시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가 말한 잉여예산은 향후 10년간 각종 국내부문 예산지출이 꾸준히 감소한다는 가정 하에 나온 것이다. 4,200여만명의 국민이 의료혜택을 못 받고 7,000만명의 어린이들이 평균 42년 이상 된 낡은 학교에서 콩나물 교실을 이룬다는 가정 말이다. 이들 학교의 시설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는 1,270억달러의 예산이 필요하다. 부시는 지붕이 새고 자녀 학교 등록금을 미처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돈을 잉여자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의 감세안의 허구에 대한 대중적 논란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중산층 미국민들이 세금삭감으로 얻게 될 직접적 이익보다는 정부가 공공부문 투자를 소홀히 함으로써 앞으로 돌아올 부담이 훨씬 더 크다.

지난 8년 동안 상하 양원을 지배해온 공화당 측은 지출삭감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조사하는데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소수당인 민주당 측에서도 민주당 출신 대통령 치하에서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분야가 있다는 사실을 노출시키기 꺼렸다. 그들은 처방약품, 교사 신축 등 클린턴이 주기적으로 내놓았던 몇가지 이슈를 쟁점화시키는 선에서 만족했다. 클린턴이 부채 감축에 신경을 썼던 만큼 공공투자의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부시 세금 삭감안에 대한 반대론자들은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 대중의 관심이 공공투자 결핍에서 벗어나 예산 ‘잉여’에만 온통 쏠려져 있기 때문이다. 부시 삭감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선 민주당은 교육과 처방약품 혜택 등 몇가지 부문에 대한 예산을 겨우 확보했을 따름이다. 민주당 측은 또 메디케어 트러스 펀드에 대한 부시의 배후공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주요 공공부문 투자를 위해 필요한 자금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새로 상원의 주도권을 잡은 민주당측이 부시가 추진하던 일을 저지할 것이라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 당장 해야할 일은 국민의 관심을 "정부가 무엇을 하느냐"에서 "정부가 무엇을 하지 않고 있느냐"로 돌리게 만들고 미국의 사회적 절망을 극화하는 것이다. 연방질병통제센터 집계에 따르면 연간 7,600만명이 식중독을 일으키고 그중 5,000명이 사망한다. 이는 지난 10년간 식품수입이 급상승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연방식품의약국(FDA)의 안전규정은 제자리걸음을 해온 탓이다. FDA는 매 8년에 한번 식품제조업체를 검사하고 있다. 식품 안전에 대한 테스트는 극히 제한된 품목에 한해 실시되고 있다.

또한 대중의 관심은 에너지 위기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의 기본 인프라 구조-도로, 교량, 공항, 교통, 철로, 상하수도, 쓰레기 처리문제 등-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미토목공학회는 최근 조사에서 연방정부에 ‘D+’ 학점을 주고 전국의 고질적 병목현상을 제거하는데 1조3,000억달러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항공 트래픽도 37%가 증가했는데 공항시설의 증가는 1%에 그치고 있다. 상수도 부문에 대한 정부 지출도 기준치에 연간 140억달러가 미달되고 있는 실정이며 대중교통 부문의 경우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을 위해서도 수백억달러의 추가예산 배정이 필요한 상태다.

이같은 기본적 공공투자 결핍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결국 미국민이다. 학교 증설과 교사 증원을 위해 재산세를 더 내야하며 질병예방의 미비로 인해 의료비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탁아비를 내야하고 도로보수의 미비와 혼잡한 트래픽으로 인해 인적, 재정적, 시간적 손실이 늘어만 간다. 결국 경제 성장의 둔화를 초래해 빈곤과 비능률의 만연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 경솔한 세금 삭감안을 저지하기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을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진실로 돌리는 것은 아직까지 늦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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