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하버드 졸업생의 색다른 삶

2001-06-0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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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원<언론인>

한국인에게서 태어난 어린이의 미래는 출생 순간에 이미 계획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버드 대학교 진학’이다. 대부분의 한인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궁극적 성공의 좁은 문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즐거이 자신을 희생한다.

어떤 부모들은 아주 극단적이 되어 아들의 이름을 하버드나 예일이라고 짓기도 한다. 나 개인적으로 적어도 하버드라고 이름을 가진 3명을 알고 있다.

지난 10년간 나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하버드나 다른 아이비 대학들을 무대로 신 양반계급이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한인사회에서는 사회와 인종간의 정의를 위해 싸우고 지켜줄 그리고 치유해 줄 사람을 절실히 갈망하고 있을 때에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하버드 엘리트 의식과 정반대의 삶을 보여준 하버드 출신의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그녀 모르게 기록하게 되었음을 축복으로 여긴다. 그녀의 이름은 조엔 김이며 미국의 도심에서 가장 비참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친구이자 멘토이며 치유자이다.

10년전 6월 오후 어느날 수줍은 소녀가 한인타운에 있던 나의 지저분한 편집실로 들어와 여름방학 동안 인턴을 요청했다. 그녀는 당시 막 고등학교를 마쳤고 가을에 대학 진학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는 지역미디어의 취재경쟁으로 부추겨진 ‘한흑 갈등’이 확산되는 어려운 때였다. 총성과 강도는 흔한 일이었으며 매일의 살인 사건은 열악한 곳에서 부부운영의 소규모 상점을 운영하는 주인들을 괴롭혔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때 조엔 김은 주로 아이비리그 재학생과 졸업생인 약 20명의 인턴 그리고 한층 나이가 많은 정규직원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도시빈민지역의 갱과 폭력, 급격히 변하고 있는 인구 그리고 인종간의 갈등에 관한 추적기사들은 그녀의 짧은 여름견습기간 신문의 앞면을 계속해서 장식했다.

9월이 오자 그녀는 바람같이 사라져 하버드대학교로 갔다. 4번의 여름이 지나간 후 나는 그녀로부터 하버드 졸업후 미국 수도에 있는 프라이스 워터하우스에서 일하게 정해졌으나 의료선교사직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들었다.

“UC 센디에고 의과대학에서 입학을 허가했는데 그것은 선생님 추천서 때문이었습니다.”라고 1996년 8월 편지를 썼다.

“그러나 금년에는 가지 않을겁니다. 준 박이라는 한인 상인이 그의 디스카운트스토어 바로 위에 있는 스트립바를 사서 태권도장으로 개조했습니다.”


“그는 이웃의 저소득층 아이들(주로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위해 그 도장을 사용했습니다. 아이들이 돈이 없어 그가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지난 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아이들이 정말로 다르게 변한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 이웃들을 인터뷰했습니다”

“스티브는 아이들이 거리에서 배회하지 않도록 학교가 끝난 후 프로그램 및 가르침을 시작해 줄 것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의과대학에 갈 계획으로 지난주 프라이스 워터하우스를 사직했습니다. 그러나 3일전 스티브와 만난 후 저의 계획을 바꿨습니다!”

“나로서는 정말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한 친구의 질문-만일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때문이었고 나의 대답은 ‘그이라면 이 아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나의 결심은 확고해졌습니다”

이것이 5년전 여름이었다. 그녀의 고민 끝에 내린 결심을 알려주는 UNICEF 카드는 나로 하여금 전형적인 하버드 출신인 조엔 김의 숨겨진 면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줬다.

현대의 잔 다르크는 외롭지 않다. 그녀는 이 나라의 황량한 도시에서 조용히 눈에 띄이지 않게 사랑으로 하고 있는 도시 혁신 운동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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