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손으로 음식을 먹는 민족도 있다. 60년대 반정부 교수로 낙인되어 상대적으로 학생들 사이에 인기 있던 어느 교수님의 여담이다. 교수들이 회식할 때면 방문을 잠그고는 저개발 국가를 방문했을 때 당혹했던, 맨손으로 음식 먹기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분들 기행이 왠지 군사정권에 대한 은유적 반항처럼 느껴졌었다.
스프나 국을 떠먹기 위해서는 동서양이 공히 삽 닮은 숟가락을 사용한다. 그러나 주요 연장은 나이프와 포크, 동양의 젓가락이다. 먼저 젓가락에 대한 소고, 영락없는 사람 인(人)자의 율동이다. 서로 기대야 식사라는 작업이 가능하다. 두 개의 작대기가 협력해야 일을 성사시키는 평화의 공존이다.
서울에 나갔을 때 친척집에서 우연히 TV 대하드라마 ‘왕건’을 보다가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빌려본다. 한참은 재미있게 보았는데 한 민족이 피를 토하며 싸우는구나 생각 된 뒤에는 마음이 무거워 졌다. 집권자들은 백성들을 빈대 잡듯 죽인다. 그러나 타국을 치고 타민족을 정벌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낸다. 이성계는 북벌의 임무를 포기하고 군을 돌려 나라를 먹어 버리지 않는가. 박정희씨가 나라를 통일시킬 임무를 포기하고 정권을 탈취한 것처럼. 아무튼 젓가락 문화의 한계점인 듯 싶다.
프랑스인들이 조상들이 조선에서 빼앗아간 책 한 권도 돌려주지 않으려는 강심장은 삼지창과 칼로 하는 식사 방법에서 나오는 뻔뻔스러움이 아닐까. 나이프가 고기 덩어리를 자르는 동안 반항하지 못하도록 짓누르던 포크는 잘려진 고기 토막을 무자비하게 찔러 입으로 가져가는 서양식사는 음식과의 전쟁이다. 동양의 젓가락은 음식의 원형을 손상시키지 않고 입으로 운반하는 게 소임의 전부다.
젓가락의 의미는 함께 한다는 공동의식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의 습성이 점령자들처럼 우리들 마음을 잠식하는 동안, 함께 라는 책임감, 소중한 공동의 빛깔도 잃어가고 있다.
포크나 나이프는 원래 한 짝씩이다. 찌르고 자르는 서양인들 식사 문화에서 지독한 개인주의가 생성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실용주의가 자랄 수 있는 입지 조건이 된다. 필요하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략하는 버릇도 식사에서 기인된 게 아닌가.
그러나 한 짝의 젓가락은 아무 짝에도 필요 없다. 동양인이 서구화하려고 의식적으로 포크다운 자신으로 성장시키려 노력하겠지만 한 짝의 젓가락 일 뿐 아무 일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된다.
포크의 나라 정찰기는 젓가락 나라 울안을 기웃거리다가 강제 착륙 당했다. 남의 집 넘겨 본 것이 미안한 게 아니라 도둑이 될 가능성을 감시하다가 자존심만 상했다고 표현한다. 땅은 엄청 크지만 혹처럼 달린 대만 하나 어쩌지 못하는데도 그들이 먼저 나서서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는 건가. 그들이 젓가락을 사용하는 한 그런 일은 훗날에도 없으리라 억지로라도 그리 믿어버리고 싶다.
공산, 자본의 사상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나의 중학교 시절, 아주 유명하다는 성직자의 예언 중에서 지금까지 기억되는 대목은 앞으로 지구 최악의 문제점은 인종의 분쟁이다.
지금은 피부로 느껴지는 문제다. 슬기롭게 위험을 넘기는 지혜는 하나, 지구의 모든 인간들이 포크와 나이프, 필요하다면 젓가락까지,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식사하는 그 방법 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