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좋은 여행기

2001-06-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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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하연/LA

작가들과 함께 떠난 2박3일 여행에서 돌아왔다. 샌타바바라를 거쳐, 솔뱅의 안데르센 공원에서 도시락 점심을 먹고, 다시 떠나 존 스타인벡의 박물관과 생가를 둘러보고 샌프란시스코로, 요세미티로 해서, 리들리를 마지막으로 거쳐 돌아왔다.

다른 곳은 다 똑같은 관광의 패턴으로 구경하고, 사진 찍고, 먹고, 마시고, 졸고, 그랬지만, 맨 나중에 들린 리들리에서는 모두들 숙연한 마음으로 이민 1세들의 적응하기 힘들었던, 농장 이민 초기 생활상을 미루어 상상하며, 몇몇 분이 아는 대로 자신의 의견이나 지식을 발표하였다. 기미년 3월1일에는 이 먼 타국에서도 별도로 식을 갖고 함께 동참하면서, 적은 수입을 쪼개 독립 운동비를 모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가난했지만 조국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웠던 그분들의 이야기는 하나하나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그분들이 최초로 사서 예배드린 교회가 있는 곳, 상당한 숫자의 그분들이 묻혀 있는 묘지 이야기를 할 때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


그 곳에는 또, 인디언서부터 독일 등의 리들리 이민역사 박물관이 있는데, 여자 인형 하나 달랑 놓여 있던 한국관을 알게 된 뜻 있는 재미문인 몇몇 분의 노력으로 지금의 어엿한 모습으로 새 단장 마무리를 했다고, 그러나 앞으로 더 많은 보충작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맨닝(Manning)이라는 길에서 우회전을 하는 바람에 한참을 되돌아오게 되어, 길 양편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바라보면서 이 곳에서 의사소통도 불편했을 그분들의 땀으로 얼룩진, 힘든 삶의 현장을 피부로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둘러본 묘지에서 한 석판에 새겨진 선명한 태극기와, 이미 남미계 이민자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한인 최초의 하얀 목조 교회, 그 꼭대기에 세워진 삐딱하게 기우러진 십자가가 뇌리에 박혀 떠오른다.

돌아오는 길에 한국에서 오신 작가들과, 이 곳에서 이번 행사를 주최한 분들과의 사이에 이 박물관에 대한, 신랄했지만 결국 서로 따뜻하게 감싸안는 의견 교환이 있었다.

초기 이민자들이 사용했던 숟가락이나 부러진 농기구, 하다 못해 그분들이 읽던 신문이나 책 한 권이라도 볼 수 있기를 기대했던 본국 작가들의 실망감이 조심스레, 그러나 학술적인 지적과 함께 노출되었고, 이 달 초에야 겨우 그만큼이라도 구색을 갖춰 놓게 된 이 곳 관계자들의 애로사항이, 자신을 예방주사도 안 맞은 똥개에 비유하는 어느 분의 멋진 파안대소와 인생철학을 삽입한 응수로 많이 누그러진 채, 현지인과 본국에서 오신 분들의 섞바꿔 식의 좌담이 이어졌다. 결국 어떻게 해서라도 그 한인 최초로 설립된 교회를 다시 한인이 사야 되겠다는 의견이 모아졌고, 그 방법까지도 본국 정부나, 본국 교회의 도움을 얻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긴 한데, 그 일은 재미 한국인의 몫이라는 분명한 본국 작가들의 뜻도 함께 전달받았다. 원로 소설가 정을병 선생님의 마지막 한 말씀을 끝으로 오십명 전원 무사히 돌아왔다.

나는 단지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좋은 여행에 참가하는 행운을 얻었지만, 느낀 것이 있다면, 나 아닌 많은 분들이 알게 모르게 모든 한인 이민자들의 보다 나은, 보다 뜻 있는 삶을 위해 자기의 시간과 돈과 땀을 바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되어, 그 고마움을 아울러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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