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뱃사람 ‘조오’

2001-06-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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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주(수필가)

유에스 버진 아일랜드 중 하나인 ‘세인트 존’은 참으로 아름다운 섬이다. 비취빛과 에메랄드 빛깔이 뒤섞인 바다가 태양에 반사돼 빛날 땐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신비한 느낌을 준다. 눈부시게 흰 모래밭 길을 맨발로 걸으면 훈풍이 뒤꿈치를 간질이고, 동트기 전 꽃길을 거닐면 꽃향기가 가슴속으로 펌프질하듯 밀려들어오는, 그런 곳이다.

그 곳에서 25년째 살고 있는 ‘조오’는 오클라호마 출신이라고 했다. 세인트 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그는 수많은 배 경기에서 우승한 관록 있는 뱃사람이다. 두 달 전에도 큰 국제경기에서 우승해 전문 잡지에 크게 소개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조오는 그 곳에 사는 내 친구 모오의 보이프렌드다. 한국 아이 말리아를 입양해서 키우던 모오와 나는 몇 년 전에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그 말리아가 벌써 15세가 되었다.


20세부터 32년째 배를 타고 있다는 조오는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영락없는 뱃사람이었다. 마치 옛날 미국의 TV 연속극이었던 ‘털보아저씨’의 주인공 같이 생긴 대단한 미남인데, 햇빛에 그슬려 얼굴은 물론 온몸이 구릿빛이다. 한 마디로 말해 바라보기만 해도 그냥 반해 버릴 만큼 대단히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특히 그에게서 돋보이는 부분은 모든 것에서 달관한 듯한 얼굴 표정일 것이다. 지극히 선량한 그 얼굴엔 평화와 따뜻함이 바닷물처럼 출렁거렸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깊은 눈빛은 이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과 인간적인 고뇌를 초월한 사람의 그것으로 보였다.

그는 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저 배를 바라다보기만 해도 좋고, 배를 디자인하고, 배를 타는 것도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해에 일찌감치 은퇴해서 지금은 직업도 없이 배만 타고 있으며, 경기가 없는 시즌에는 클럽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계산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사는 삶이 얼마나 부럽던지 그의 말만 듣고 있어도 그의 평화와 무욕(無慾)이 내게 전해지는 듯했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또 다른 그런 얼굴을 기억해 냈다. 야생 침팬지 연구가 제인 구달이다. 어릴 때부터 아프리카 밀림을 동경했다는 제인은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침팬지 연구를 시작한 선구적인 여성이다. 75년에는 ‘제인 구달 연구소’를 설립했고, 95년에는 그 공로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작위를 받았다.

제인 구달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열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꿈을 이룬 보기 드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간이 품성을 지닌 유일한 동물이 아니며, 합리적 사고와 문제해결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며, 기쁨과 슬픔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육체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고통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덜 오만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9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해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조금씩, 매일, 함께, 노력한다면 지구의 미래에는 희망이 있다”고 말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제인은 정직함, 자기 통제, 용기, 생명 존중, 공손함, 연민 관용 같은 근본적인 가치들을 침팬지로부터 많이 배웠다고 했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두 사람, 조오와 제인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극기와 달관은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 그 자체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간을 초월한 숲 속의 평화와 동물들의 단순한 삶, 흔들리는 나뭇잎, 살랑이는 물결, 하얀 밤꽃들의 향기, 비 온 뒤 마른 땅의 냄새 등이 제인에게 희망이었다면, 광활한 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 오페라 아리아처럼 멋진 물새들의 합창들이 조오에겐 영감의 산실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연은 영혼을 풍요하게 해주는 영양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세인트 존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선량함이 넘치고, 마음이 넉넉했으며 삶에 찌든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의 휴가를 세인트 존에서 보내면서 나는 내 가슴속에 있는 무엇들을 섬 곳곳에 숨겨놓고 돌아왔다. 어쩌면 조오나 제인의 자연 사랑이 내게도 전이되어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얼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야무진 꿈을 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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