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 떠나자!”

2001-05-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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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7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엘렌 버스틴은 젊어서 나이 든 역을 많이 했다. 촬영을 할 때면 늘 늙어 보이게 분장을 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분의 촬영이 끝나고 분장을 지운후 집에 가면서 ‘굿나잇’ 인사를 하면 촬영장 스텝들이 “저 여자가 누구지?” 하며 못알아 보았다고 한다.

“매일 하루가 끝날때마다 화장 지우듯 나이를 지워버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는 70을 바라보는 노배우가 얼마전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한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워버리고 싶은 게 어디 나이 뿐일까. 젊어서 꿈꿨던 것과는 영 다르게 펼쳐지는 삶, “이게 아닌데”싶은 이런 저런 현실들, 그 모두를 화장 지우듯 스윽 지워버리고 인생의 판을 새로 짤수는 없을까 - 신년초의 희망과 각오가 자취를 감추고 슬슬 한해가 지루해지는 이때쯤이면 으레 찾아드는 생각이다. 5월말 메모리얼데이 연휴를 시작으로 휴가철이 시작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시기적으로 적절하다. 일상의 현실을 지워버릴수는 없어도 잠깐씩 거기서 탈출하는 일은 가능한데, 그게 바로 휴가여행이다.


친치 중에 여행을 유난히 잘 다니는 가족이 있다. 특히 그 남편이 여행을 좋아해서 이 가족은 매년 4-5번은 여행을 떠난다. 메모리얼데이, 독립기념일, 노동절, 크리스마스등 연휴가 있는 때는 예외없이 집을 떠난다. 부부가 전문직 종사자로 시간과 돈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서 가능한 일 아니냐고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고 그 부부는 말한다.

“같은 돈이 있어도 그걸 어디다 쓰느냐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생활철학의 문제이고, 우선순위의 문제이지요”

늙어서 휠체어에 앉아 돈 많으면 무슨 소용인가, 재물을 쌓아두기 보다는 그 돈 가지고 두루 여행다니며 넓은 세상을 보자는 것이 그 부부의 생각이다. 경험 혹은 추억에 시간과 돈을 투자를 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렇다.

“사람은 자기 경험만큼의 삶을 산다고 믿어요. 평생 한곳에 묶여 있는 사람과 전 세계를 다니며 넓은 안목을 가진 사람과는 그 삶의 질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여행에 관한한 이 부부의 철학은 분명하다. 경제적 여유가 없던 결혼 초기 크레딧 카드로 5만달러를 긁고 해외여행을 다녀와서는 빚 갚느라 바지가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입은 적도 있다.

인생을 젊게 만드는 것은 사랑과 여행이라고 한다. 사랑과 여행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대상에 대한 신선한 호기심이라고 본다. 사랑에 빠졌을 때나 여행을 할 때면 모든 감각이 열리고 감성이 예민해져서 무엇이든‘아-! ‘하고 감탄하며 받아들일 자세가 갖춰진다.

매일 출퇴근길에 할리웃 거리를 지나는데 가끔 재미있는 현상이 보인다. 스타들의 이름이 줄지어 새겨진 ‘명성의 거리’에 두 종류의 분명하게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있다. 표정이 상기되고 온몸에서 생동감이 넘치는 그룹과 별 감흥없이 무표정한 사람들. 전자는 여행온 사람들이고 후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다. 똑같은 거리에서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낼까. 대상에 대해 감동할 준비가 되어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것이다. 일상을 떠난 사람과 일상의 속에 갇힌 사람의 차이다.

휴가여행은 개미 쳇바퀴 돌듯 사느라 후줄그레해진 심신을 시원한 바람에 훌훌 털어 빳빳하게 만드는 기회이다. 그렇게 한번씩 바람을 쐬어야 삶에 생기가 되살아 나는데 이민생활에서 휴가는 쉽지 않다. 2-3년전 LA 한인들의 휴가 실태를 조사한 것을 보니 거의 절반이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휴가를 못간다고 했다. 특히 부부가 자영업을 하는 경우 “휴가는 꿈도 못꾼다”는 사람들이 많다. 며칠씩 가게를 맡길 사람을 구하기도 힘들고 가게문을 닫는 것도 쉽지가 않기 때문이란다.

휴식 없이 일만 하는 삶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다. 자동차가 브레이크 없이 달리면 어떻게 될지는 누구나 다 안다. 멀리 관망하는 눈으로 자동차를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소중한 내 삶에 대해서는 왜 그런 눈을 갖지 못할까. 일상의 현실에 너무 갇혀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서 과감하게 떠나보자. 안보이던 나의 ‘일상’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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