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름 백과사전

2001-05-24 (목)
크게 작게

▶ 크리스 포먼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

얼마 전에 미스터 백 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간단한 소개 인사가 끝난 후, 미스터 백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현관으로 나갔고, 나는 잠시동안 응접실에 혼자 있었다.

나쁜 취미라고 고백하는데, 나는 낯선 집을 방문하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책장으로 향한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을 때는 책장 앞으로 가서 책을 살피는 나쁜 버릇도 있다. 책제목을 읽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기도 하고, 쭈그리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기도 한다. 책제목만을 보고도 책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면 책 주인에게 금방 친근감이 생기기도 한다. "오, 당신도 공상과학소설을 좋아하는군요. 나도 아지모프의 팬인데요" 하면서 책 주인과 대화의 물꼬를 틀 수도 있다.

미스터 백의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 중에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세트처럼 보이는 책들이 책장 가운데 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백과사전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백과사전보다 키가 큰 책이었고, 책표지가 한문으로 써 있었다. 무슨 책인가 하고 호기심에 끌려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마침 미스터 백이 돌아왔다. "무슨 책입니까?"하고 나는 20권도 넘는 백과사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오, 우리 조상들의 이름을 기록한 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책에 수원 백씨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었다 하였다. 중국 당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상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이라고 하였다.


미스터 백은 책을 뽑아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페이지마다 이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펴서 보여주었다. 자기 아이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면서 식구들 이름을 하나 하나 읽어 주었다. 최근에 태어난 막내아들의 이름이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면서 다음 번에 책이 개정될 때 아이의 이름이 영어로 기록될 것이라 하였다. 책값으로 쌀 한 가마를 주었다하면서 웃었다. 15세기에 태어난 조상의 이름과 21세기에 태어난 자손의 이름이 한곳에 적힌 책이 너무 신기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가족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 어떤 다른 일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아마 한국에서도 몇백년 전 만하여도 나라 안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이 조상의 역사를 기록한 족보이었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언제 어디서 낳았다는 기록은 마을의 판서가 맡은 중책이었을 것이다. 성경에도 마찬가지로 누가 누구의 아버지이며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나의 조상들의 이름을 타이프로 친다면 아마 종이 한 장이면 충분할 것 같다. 나의 큰누이가 도와준다면 아마 두 장 정도는 채울까 싶다. 100여년 전 조부모님들이 미국으로 이민 왔을 때 가져온 몇 장의 사진 이외에는 조상들에 관한 지식이 없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50년의 공산주의는 유럽에 있는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이 말살되고 심지어는 그들이 살았던 나라 이름까지도 몇 번씩 바뀌었다.

우리 집안의 뿌리는 신세계로 이민 온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하였다. 구세계의 가족사항은 거의 모른다. 과거를 모른다는 것은 뿌리가 빈곤한 나무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과거를 모른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과거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다. 새싹이 뿌리를 내리는데 과거의 부담이 없어 신세계가 요구하는 환경에 정착할 수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신세계에서 태어난 미스터 백의 아이들을 생각하여 본다. 미국에서 태어난 자손들에게 족보가 의미 있는 책으로 남을까. 미국에 사는 자손들이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는 전통을 얼마동안이나 유지할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에 조상들의 이름이 담긴 백과사전을 그들은 읽을 수 있을까.

신세계는 과거를 잊게 하는 경향이 있다. 대신에 신세계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지향적인 신세계에서 살면서 구세대에서 지켜오던 전통이 어떻게 변모될지 궁금하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