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꿈속의 기도

2001-05-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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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화(샌프란시스코)

한 사냥꾼이 숲 속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으르렁거리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는 재빨리 총을 잡았다. 그러나 탄환이 없었다. 호랑이는 예리한 이빨을 보이며 달려들었다.

사내는 속수무책이었다. 꼼짝없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사내에게는 참으로 묘한 느낌이 다가 왔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노력해 보면 이 무서운 꿈속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내는 자기의 뺨을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러자 조금 후 호랑이는 사라져 버렸다. 천지를 찌렁찌렁 울리던 맹수의 울음소리는 간 데 없었다. 아아, 사냥꾼은 그의 침대 위에서 막 잠이 깬 것이다. 그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호랑이에게 쫓기던 그 두려움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사내는 그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만 배꼽을 쥐고 웃어 버렸다.

“어디 갔는가, 도대체 그 호랑이는 어디 갔는가?”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사실이 모조리 꿈이었다는 데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사내는 가득 찬 감사의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잔의 차를 맛깔 나게 타서 마셨다. 그리고 창 밖으로 나아가 양지쪽 안락의자에 앉아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 후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차양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노곤한 잠 기운이 안개처럼 몰려왔다. “아, 잠이나 한숨 더 자야겠다…” 그는 길게 하품을 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조금 있더니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내가 또 꿈을 꾸고 있구나.”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집채만한 호랑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호랑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꺼져라, 너는 아직도 그 호랑이란 말이냐. 이미 널 꿈꿨기 때문에 난 피곤해 있단 말야.”


그러나 호랑이는 주저 없이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너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는 꿈일 뿐이야. 내 꿈속의 환영(幻影)일 뿐이라고!” 그는 호랑이에게 다가가서는 사정없이 호랑이의 넓은 뺨을 후려쳤다. 그에게 뺨을 얻어맞고 얼떨떨해진 호랑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원 참, 별 희한한 인간도 다 있구나! 사람들은 나를 보면 혼이 빠져라 달아나 버리는데… 내원 참, 별 이상한 녀석도 다 봤다.”

호랑이는 기가 차서 그냥 달아나 버렸다. 호랑이가 사라진 후 곧 얼마 안되어 사내는 지금 그 호랑이가 꿈속이 아니라 진짜 호랑이라는 것을 섬뜩 깨달았다. 그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비가 내 꿈을 꾼 건지 내가 나비 꿈을 꾼 건지 심각하게 헷갈렸던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과 흡사한 얘기다. 깨어 있는 현실과 꿈이란 또 다른 현실을 명쾌히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꿈속에서 꿈이란 걸 아는 꿈을 소위 ‘투명한 꿈’(Lucid Dreaming)이라 하는데, 꿈속에서 꿈이라 생각했는데 진짜론 꿈이 아닌 깨어있는 현실이라면 얼마나 섬뜩할까? 배꼽을 쥐고 웃어버릴 배포와 지혜가 충만한 이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또는 모르고도 아는 척 호랑이 뺨을 철썩 때린다? 우리 곁에 왔던 붓다 성철스님은 사랑하는 도반들께 항시 “잘 때도 되느냐?”고 물으셨다는데…

메카로 성지순례 가던 비행기가 추락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이슬람교도들이 무릎을 꿇고 수선스레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 중 한 사람 수피(Sufi) 신비가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다. 바삐 기도하던 한 사람이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묻자 엷은 미소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미 기도하는 상태에 들어 있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소. 기도밖에 있는 사람만이 따로 기도할 수 있는 법이오. 나는 항시 기도의 상태에 들어 있고. 꿈속에서도 온통 기도뿐이라오. 사실은 나 자신이 바로 기도이고, 매 순간이 하나의 기도일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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