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핵가족, 핵 인간, 그리고 가치관의 붕괴

2001-05-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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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세철 <논설실장>

핵가족(nuclear family)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49년이다. 결혼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류학자 조지 머독이 처음 이 말을 사용했다. 이후 핵가족은 미국의 전통적 가정을 의미하게 됐다.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고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가사를 돌본다는 게 핵가족의 일반적 개념이다.

핵가족은 미국사회에서 일종의 도덕적 불문율이었다. 부부와 어린이로 구성된 가정이 정상적 가정이고 여자 홀로 어린이를 키운다거나, 다른 형태의 가정은 비정상으로 간주됐던 것이다. 한마디로 핵가족 형태가 아닌 가정은 그 도덕적 기반까지 의심받던 게 미국사회의 분위기였다.

미국의 전통적 가정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고 난리다. 2000년 센서스 결과 미국의 전통적 가정, 핵가족 형태의 가정은 미국내 전 가정의 4분의1도 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나서다. 1960년 현재 전체 미국 가정의 45%를 차지했던 핵가족은 1970년에는 38.8%, 80년에는 30.8%, 90년에는 25.6%로 줄더니 2000년에는 23.5%로 그 비율이 더 낮아진 것이다.


대조적으로 급격히 늘고 있는 가정이 독신자 가정이다. 핵가족 형태의 가정 수를 크게 앞질렀다. 이와 함께 여자 홀로 아이를 키우는 가정, 미혼동거 남녀로 이루어진 가정 등이 크게 증가해 미국의 가정은 형태에 있어 극도의 다양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한층 다양화된 가정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인다. 아무리 다양성을 추구하는 미국이지만 전통적 핵가족이 오히려 비정상 가정같이 보이는 오늘의 상황은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는 미국 사회를 지탱해 오던 도덕적 규범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어서다.

2000년 센서스 결과를 다루는 신문 등의 제목은 그래서인지 대부분이 개탄조다. "왜 전통적 가정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가"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가 커버 스토리로 이 기사를 다루면서 붙인 제목이다. 뉴스위크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미혼모 급증 사태다. 미혼모 하면 빈곤층이나 흑인계 10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과거의 통념이었는데 이제는 백인계 20대 여성으로 미혼모의 주류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에서 혼전 동거가 일반화되면서 교육수준이 높은 20대 백인 여성 미혼모가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뉴스위크지는 파헤치고 있다.

전통적 미국 가정 소멸 상황을 맞아 미언론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주로 대증치료성 방안이다. 모든 게 전통적 핵가족을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학교 시스템도 그 중의 하나로 아버지는 직장에,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는 전제 하에 현재의 학교 교육시스템이 짜여져 있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보도에는 일종의 체념이 깔려 있는 느낌이다. 새 시대 라이프 스타일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와 함께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려는 태도다. 뉴욕타임스 사설이 바로 그렇다. 이 사설의 결론은 이런 식이다. "미혼모 급증 등 사태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센서스 결과를 미국의 사회구조가 한층 허약해진 징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핵가족 형태의 가정만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가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가정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어딘지 본질적인 문제의 지적을 회피하고 있는 인상이다. 문제의 본질은 정체성(identity) 상실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정체성 상실은 다름 아닌 물질적 풍요의 부산물이다.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하는 ‘풍요 시대의 핵 인간’(nuclear man)이 보이고 있는 정신적 황폐가 미국 사회에 만연했고 그 결과 미국의 전통적 가치관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이 가능한 것 같아서다.

이같은 지적을 한 사람은 역사 심리학자 로버트 립튼이다. 그에 따르면 풍요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 다른 말로 하면 핵 인간은 역사적 단절, 단편화된 이데올로기 등이 특징으로 핵 인간은 자신을 역사나 전통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로 여겨 ‘지금 여기’(the here and now)만 중요시하는 세기말적 의식구조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인간에 있어 삶은 치열한 결단이 아닌 실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풍요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때 이는 정신적 공황을 불러와 그 결과 기존의 가치체계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전통적 미국 가정의 소멸’- 상당히 심각한 뉴스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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