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왕처럼 살고 있소

2001-05-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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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한국에서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연속극 ‘허준’에 허 의원을 사모한 나머지 궁궐에 의녀로 들어간 예진 아씨가 중국에서 내려온 사신의 밤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하늘이 도운 탓인지 중국 사신이 복통이 나는 바람에 그를 치료해 오히려 상을 받는 행운을 얻게되지만 ‘대국’에서 사신이 오면 육탄 로비를 벌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세계 굴지의 로비 투자 그룹인 칼라일사의 미주 한인 출신 말단 직원이 한국에 파견된 후 업계로부터 받은 극진한 환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e메일로 보냈다 말썽이 나자 사표를 낸 사건이 최근 국제 금융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다우존스, 블룸버그등 주요 경제 통신사가 타전한 뉴스에 따르면 24살짜리 피터 정씨는 한국에 발령 받아 도착하자마자 한강변이 바라다 보이는 방 3개 짜리(2000 평방 피트 규모) 아파트를 제공받았으며 매일 밤 최고급 식당과 술집에서 향응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정씨는 11명의 친구들에게 보낸 e메일에서 “저녁마다 한국 회사 간부가 포셰로 모시러 오며 보통 하루 3명의 여성이 잠자리를 같이 하겠다고 전화를 해온다. 한국의 화끈한 영계를 모두 잡아먹겠다. 나는 지금 왕처럼 살고 있다”고 의기양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외국 투자가들에 대한 로비가 도를 지나쳤다는 얘기는 새삼스런 것은 아니지만 이번 사건은 주요 통신을 타고 소개되는 바람에 한국 업계의 치부가 전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됐다. 급기야는 워싱턴 DC에 있는 칼라일 본사에 까지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정씨는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가 고문, 베이커 전 국무장관이 파트너, 칼루치 전 국방장관이 회장으로 있는 칼라일 그룹은 로비와 투자를 겸하는 최고급 수준의 압력단체로 한국에서는 박태준 전 총리등이 멤버로 들어 있다.

정씨는 작년 9월 메릴 린치에 입사, 올 4월 그만두고 칼라일사로 옮겼다. 이 회사에 들어간 지 불과 2주밖에 안 된 말단 직원이 이 정도 향응을 받았으면 고위직 인사한테는 어떤 대접이 베풀어지고 있는지 상상하기 힘들다.

사건이 터지자 한국 언론에서는 이를 계기로 한국의 잘못된 접대 문화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이 일고 있다. IMF 이후 한국에서는 미국 대기업 물 좀 먹은 사람이면 무조건 칙사 대접을 받는다는 비판이 제기된 지 오래다. 언제쯤이면 한국 기업들이 술 접대가 아니라 기술과 재정 견실도를 바탕으로 외자를 유치하는 날이 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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