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올드타이머의 부음

2001-05-2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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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는 대형참사가 많았다. 뉴욕발 서울행 대한항공 007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사망했고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이범석외무장관등 엘리트각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대소사가 많았다. 샌프란시스코 중국갱단 두목을 살해한 혐의로 10년간 옥고를 치르던 이철수씨가 커뮤니티의 끈질긴 구명운동 덕분에 가석방으로 풀려났고 1.5세들의 정치단체인 한미연합회와 여성권익 신장을 위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남가주지부가 발족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해 LA한인사회 최대의 뉴스는 한인회장선거였다. 전년도인 1982년 선거와 소송을 거듭하며 공백상태에 있었던 한인회는 1983년 들어서면서 선관위를 조직하고 재건 움직임에 들어갔다. 1982년 선거에서 자격미달을 이유로 실격패를 선언당했다가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판결을 얻어냈던 사업가 잔 문씨와 서독광부 출신 사업가 장준철씨가 직선으로 겨뤘던 그해 선거의 열기는 한국 국회의원선거 못지않게 대단했다.


양후보가 뿌린 선거자금으로 타운에는 활기가 넘쳤다. 식당들마다 이단체,저단체 모임이 있었고 두후보는 겹치기 출연을 해가며 지지를 호소하기 바빴다. 차터박스,역마차등 당시 잘나가던 술집에는 빈방이 없을 정도로 흥청거렸고 "제돈내고 밥먹고 술마시면 팔불출"이란 소리를 들었다. ‘모후보 진영에서 선거자금을 50만달러를 뿌렸다’느니 ‘모후보는 지지를 약속한 어느 단체장에게 얼마를 줬다’느니 하는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6월18일 선거가 치러지고 잔 문후보가 당선됐지만 선관위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장준철후보가 선거결과에 불복,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한인회 정상화는 또다시 무산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해 선거에서 미법원 소송을 통해 이민휘씨의 한인회장취임을 저지했던 잔 문후보가 이번에는 미법원 소송을 통해 한인회장 취임을 저지당하는 신세가 됐다.

타이어판매회사를 경영하며 그다지 큰 재력을 갖고있지 못했던 장준철씨는 한인회장선거와 뒤이은 소송비용등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됐다. 한동안 한인사회를 떠나 있다가 몇 년전 부동산 세일즈맨으로 변신하여 다시 발을 디딘 그에게 소송까지 갔던 일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한인사회 대표가 부당한 절차로 뽑히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소송까지 갔던 것"이라며 있는 재산을 다털어 넣었지만 결코 후회는 않는다고 밝혔다.

술담배까지 끊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던 그가 지난17일 사업차 애리조나 방문했던 길에 급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64세. LA한인사회 올드타이머 한사람이 아쉬운 나이에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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