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한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이번 생일이 생애 마지막 생일이다 생각하고 산다면 어떨까? 사는 게 달라지지 않을까?”
신날 것도, 흥분할 것도 없고, 그 날이 그 날 같은, 삶이 진부하다고 말하기도 진부한 평범한 40대들의 모임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의 삶을 강물에 비유한다면, 어린 시절의 삶이라는 강의 수심은 발목정도의 깊이다. 아이들에게 발목을 찰랑이는 강은 매일이 새롭고 즐거운 놀이터이다. 청년기에 들어서면 물은 허리쯤까지 깊어진다. 삶의 압박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지만 운신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강 주변을 둘러보며 의지에 따라 몸을 틀어 이쪽으로 갈 수도 있고 저쪽으로 갈 수도 있다.
중년으로 들어서면서 강물은 목까지 차 오른다. 이런 저런 인연들에 묶이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하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흐름에 떠밀려 사는 듯한 느낌 - 그것이 40대를 관통하며 느끼는 무력감일 것이다.
삶이 지루한 것은 특징 없는 날들의 연속 때문이다. 날들이 특징이 없는 것은 그 날들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날들이 다음 생일 이전에 끝난다고 가정한다면 그래도 지루하기만 할 것인가.
본보 한국판에는 요즘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가 연재되고 있다. 지난주 소설가 최인호씨는 ‘하늘에 계신, 그리운 어머니께’란 글을 쓰면서 사람들의 눈멂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살아있을 때는 서로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 사랑이나 슬픔, 기쁨도 대충대충 나누는데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면 그것이 참으로 가슴 아픔 추억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살아있음은 눈 먼 세계와도 같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살아 있을 때의 기쁨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썼다.
나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삶에 ‘끝’이 없을 것처럼 막연히 여기는 착각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못 보게 하는 것이다.
‘끝’을 아는 지혜는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캄캄하고 긴 터널에 갇혀도 터널에 끝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기어이 빠져나올 수가 있다.
지난 주말 UC버클리 졸업식에서는 특별한 순서가 있었다. 만학의 베트남 난민 출신 여성, 빅토리아 구엔의 ‘인간승리’를 높이 평가하며 표창하는 순서였다. 40세 이 여성의 삶의 강은 유난히 물살이 세고 암초 투성이였다. 사이공 함락 후 2년반의 비참한 집단수용소 생활, 목숨을 건 해상탈출, 선천성 심장병의 쌍둥이 딸 출산과 이혼, 뇌질환… 어둡고 어두운 터널들을 그는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믿음으로 이겨냈다고 한다.
그렇게 ‘끝’을 보는 눈으로 살아온 그는 “매일 매일이 행복하기만 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완전히 새로운 ‘24시간이라는 귀한 선물’이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같은 재료를 주어도 사람마다 만들어 내는 요리가 다르다. 군침 돌게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사람도 있고, 단맛 다 빠지고 뻣뻣한 요리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인생이라는 요리는 특히 천차만별이다. 20대에는 삶의 모습이 별 차이 없던 사람들이 40대, 50대에 이르며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를 만드는 것을 주위에서 본다. 삶의 조건이 비슷했다면 삶에 대한 태도가 그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맛깔스럽게 하는 양념은 즐거움이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까지 왜 못하고 살았을까’라는 책을 보면 틀에 박힌 생활에 즐거움이라는 양념을 뿌리는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다. 사랑하는 이와 바닷가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기, 가끔은 최고급 식당에서 우아하게 식사하기, 혼자 훌쩍 여행 떠나기, 토요일 오후를 도서관에서 보내기, 혹은 스트레스 있을 때면 아이스크림 한 통 다 먹어치우기…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도 않은 일들이다.
내 삶이 여기서 끝난다면 무엇이 제일 아쉬울까.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의 순위를 바꾸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가서, 이 세상이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