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장애인”

2001-05-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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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석

▶ 장애인 돕기 안종길 이사

미국에 온 한인들을 가장 놀라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장애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다. 얼마 전 한국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애덤 킹 스토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길거리에 버려져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었을 지체부자유자들도 정상인 못지 않게 밝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는 곳이 미국이다. 가주는 물론 전국에서 가장 큰 장애자 구호기관인 장애인 지역 센터 이사로 있는 안종길씨를 만나 미 장애자 구호 실태에 관해 들어봤다.


-지금 이사로 계신 장애인 지역 센터가 어떤 곳인지 먼저 설명을 해주시죠.

▲제가 봉사하고 있는 하버 지역센터는 가주 총 21개 지역센터(Regional Centers)의 하나입니다. 이 센터의 지원을 받는 미국인은 총 7,000명 정도고 그중 한인들은 70여명 정도 됩니다. 지역 센터의 규모가 대체로 비슷하니까 가주 전체로는 14만, 한인만도 1,400명 이상이 혜택을 입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 센터의 전체 연예산은 25억 달러 규모로 가주는 물론 미국에서도 가장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센터가 생긴지는 얼마나 됩니까.

▲1965년 당시 주의원이던 프랭크 레터만이라는 사람이 미국의 장애자 보호시설이 너무 열악한 데 충격을 받아 법을 제정, 처음에는 정부기관으로 시작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 후 민영화돼 가주 정부가 전액을 지원하다 최근 연방 정부에서 절반을 도와 주기로 해 지금은 주·연방 합작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미국도 처음부터 장애자를 위한 시설이 잘 돼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장애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지금은 장애자 천국이지만 당시만 해도 엉망진창이었던 모양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에 일찍 눈 뜬 스웨덴 조사팀이 미국 장애자 시설을 둘러보러 왔다가 ‘동물 우리인지 사람 사는 곳인지 분간이 안 간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요. 이 보고서를 계기로 장애자를 인간적으로 대해주자는 운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인들은 아직도 장애자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 어떻게 이 단체에 관여하게 됐습니까.

▲어느 날 이 센터에서 장애인 단체를 도와 달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희 집에도 장애인 아들이 하나 있어 관심을 갖고 자원 봉사 모임에 참석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사 자리에 까지 앉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일한 소감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일하면서 미국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됐습니다. 첫째는 장애자에 대한 각별한 배려입니다. 유명 변호사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도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는 인종에 관계없이 능력과 성실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입니다. 이곳은 이사 가운데 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안은 저 하나뿐인데도 타인종이라고 깔보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7년째 일하고 있는데 오히려 경력이 짧은 백인들이 선임자로 깍듯이 대우해 줍니다. 현재 보직으로 총무 자리를 맡고 있는데 직급이 봉사 연한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더 오래 있으면 회장 자리도 ‘따놓은 당상’입니다(웃음).


-한인들은 아직도 가족 가운데 장애자가 있으면 쉬쉬하며 숨기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장애자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에서 부모가 최고 엘리트인 가정에 정박아가 생기자 이를 지하실에 숨겨 놓고 길러 완전히 병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세들은 아직도 장애인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여기서 자란 2세들은 전혀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저희 집만 해도 저는 다른 사람이 장애인 자식 만나는 것을 좀 꺼리는데 딸 아이는 자랑스럽게 자기 오빠를 친구들에게 소개하며 ‘우리와는 좀 다른 점이 있지만 머리는 나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1세가 오히려 이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자를 둔 한인가정이 이 센터 혜택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괜히 신청했다 망신만 당하지 않을까’하는 자격지심을 버리고 무조건 신청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한인들은 한국에서 관청에 워낙 주눅이 들어서인지 한번 신청했다 거절당하며 상처를 입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일선 관리가 신청을 기각하더라도 어필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습니다. 어필을 하면 재수용되는 확률이 50%는 됩니다. 거기서 또 거절당하면 2차 어필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다시 25%는 구제됩니다. 끝까지 물고늘어지면 거의 구제된다고 봐도 됩니다. 일단 받아들여지면 지원액은 개개인의 필요에 따라 정해지며 최고한도도 없습니다.


-장애자 돕기를 하다 겪은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시죠.

▲저의 집 아들이 한동안 1시간 넘게 떨어진 학교를 다녔습니다. 집 근처 학교에 장애자를 수용할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죠. 선처를 부탁했지만 학교측에서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너무 화가 나 하루는 변호사를 데리고 교장을 만났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즉시 문제를 해결해줬습니다. ‘장애자 보호법’에 의해 학교가 이들을 위한 시설을 마련해주지 않을 경우 정부가 장애인 편을 들어 소송을 해주며 나중에 지면 학교측이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물어줘야 할 뿐 아니라 교장이 문책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한인 학부모들도 억울하다 생각되면 즉시 법적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인사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 미국에서는 장애자라는 어휘조차 좀처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박아 지체부자유자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people who needs special care)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편입니다. 말 한마디에도 장애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가 엿보입니다. 인간 치고 신체나 정신 모두가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조금씩 장애인인입니다. 가정의 달인 5월을 맞아 한인사회에도 장애인을 박대하기보다는 같은 인간으로 따뜻이 보살피겠다는 의식변화가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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