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운 정 미운 정

2001-05-1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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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희<샌프란시스코>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예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때론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한데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에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건 아마도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고운 정보다는 훨씬 질긴 사랑의 감정이고,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운 정과 미운 정이 하나가 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결혼생활이 아닌가싶다. 결혼생활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처음 부분은 사랑하는 가운데 함께 행복을 느끼기도 하며 서로에게 희망을 갖고 현재에 만족하기도 한다. 중간 부분은 서로에게 실망하고 무덤덤해지면서 조금씩 미워지기도 하며 서서히 서로에게 가졌던 희망을 버리고, 그 대신에 자식이나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사라져가고 있는 자기의 시간을 붙잡아보려고 손을 뻗어보지만 힘이 모자람을 느끼게 되고 이미 늙어 자기 자신조차도 보기 싫은 얼굴이 되어버린 뒤라 상대방이 불쌍해져 서로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결혼한 후에는 사랑하는 시간보다는 인내해야 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는 상대방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가 있는 고운 정보다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지고 쓰러지며 걸어가면서 생기게 되는 일종의 유대감과도 같은 미운 정이 더 필요하게 마련이다.

부부 사이는 때론 너무 가까워서 자칫 편안함이 넘어, 서로에게 넘치는 기대감과 지나친 신뢰 때문에 크고 작은 불평과 상처가 적지 않게 일게된다. 서로 좋다가도 다투게 되면 앞으로는 어찌 사나 싶고, 그러려니 생각하며 그동안 참고 살아왔던 일들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순간을 맞을 때마다, 부부 사이를 지탱해 주는 힘은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알게 모르게 든 미운 정임을 느낄 때가 많다. 우리는 부부 사이에서 늘 고운 정을 기대하지만 사실은 미운 정이 따라야 부부 사이가 완성이 된다. 고운 정 한가지만으로는 모래성 밖에 되지 않는다.

시멘트가 들어가야 비로소 돌처럼 굳은 벽돌이 되는 이치와 같다.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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