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통신혁명과 ‘창조적 파괴’

2001-05-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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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코노미스트

▶ 민경훈 <편집위원>

지구상에 생명이 출현한 것은 대략 30억년 전으로 추정된다. 지구상에 존재한 생물체중 가장 오래된 화석이 담긴 바위가 호주에서 발견됐는데 방사선 측정 결과 그 정도 연도가 나왔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화석으로 남은 생명체가 이미 상당히 진화된 상태라는 점을 들어 생명 탄생을 35억년 전까지 올려 잡기도 한다. 지구 나이가 46억 살이고 처음 10억년 간은 너무 뜨거워 생명이 존재할 수 없었으니까 이 추정이 맞는다면 지구가 식자마자 생명이 탄생한 셈이다.그후 30억년 동안 단세포 생물로 존재하던 생명체가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것은 6억년전 캄브리아기 때부터다. 갖가지 어류를 비롯한 수많은 고등생명체가 출현한 것도 이 때다. 고생물학자들이 이 시기를 ‘캄브리아 폭발’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어류의 특징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알을 낳는다는 점이다. 한번에 수백개씩 낳는 것은 보통이고 수천, 수만, 수백만개까지 산란하는 어족도 부지기수다. 이처럼 많은 알을 낳아도 성인으로 자라는 물고기는 극소수다. 대다수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거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일찍 도태되고 만다.


이같은 다산은 어찌 보면 낭비처럼 보이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를 돌볼 능력도 없고 수시로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지능도 부족한 물고기로서는 숫자를 무기로 삼는 것도 한 방책이다. 드넓은 바다를 무대로 수억년 동안 어류가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전략의 효율성을 입증해준다.

지난 10년간 세계 경제계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의 하나가 통신혁명이다. 90년대 초만 해도 경찰이나 부유층이 아니면 갖기 힘들었던 무선 전화기는 이제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휴대하고 다닐 정도로 보편화됐으며 케이블 TV나 컴퓨터 한 두 대쯤 없는 집은 찾기 힘들어졌다. 위성에서 직접 쏘는 접시 TV로 수백개의 채널을 골라 시청하는가 하면 전화로는 인터넷 접속속도가 느리다고 DSL 등 초고속 서비스를 신청하는 사람이 나날이 늘고 있다. 안방에 낮아 영화를 주문해 보는 시대가 오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첨단 테크놀로지의 등장으로 기업들의 비즈니스 기회도 대폭 늘어났다. 지난 수년간의 유례 없는 호황이 각종 전화회사, 닷컴등 인터넷 관련회사, 마이크로칩과 서버등 장비 제조 회사등 통신 관련 기업의 융성에 기인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닷컴등 알맹이 없이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한몫 잡으려던 엉터리 회사들이 무너지면서 그들에게 장비와 서비스를 제공하던 굵직굵직한 초대형 회사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수년간 통신 회사가 설비 투자에 쏟아 부은 돈만 6,500억 달러. 많은 전문가들은 이 액수중 거의 대부분이 이미 하수구로 흘러 내려간 것으로 보고 있다. 80년대 경제를 망쳐 놓을 것이라고 온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이빙스 & 론(S&L) 총 손실액이 1,500억 달러 정도니까 통신회사들의 투자총액이 얼마나 천문학적 숫자인지 짐작이 간다. 이들 회사가 지난 1년간 주가 폭락으로 입은 5,000억 달러의 장부상 손실은 여기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들이 이처럼 거액을 투자한 이유는 남들이 모두 죽기 살기로 뛰어들고 있는데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군중심리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무한한 이윤이 보장돼 있는 분야라는 말만 믿고 손익계산을 해보지도 않은 채 빚을 얻어 돈부터 던지고 본 결과는 공급과잉이었다.

이들 업체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기술 혁신의 속도가 워낙 빨라 과잉공급이 해소되기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점. 수년후 수요가 따라 준다 해도 이미 그때에는 새 기술이 나와 지금 갖고 있는 장비는 고물이나 다름없게 된다는 것이다. 불과 작년까지 주가총액 5,500억 달러로 세계 최대 기업임을 자랑하던 시스코는 최근 수십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하며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다. 일부에서 시스코의 회복불능까지 점치는 것도 광통신의 발달로 시스코의 주력 비즈니스인 통신 장비 제조는 이미 사양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통신업체의 과잉투자는 미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유럽 최대의 통신회사는 브리티시텔컴도 430억달러의 부채에 허덕이고 있으며 도이치 텔레컴, 프랑스 텔레컴, 네덜란드 로얄 KPN도 마찬가지다. 함께 1,000억 달러를 들여 소위 3세대 무선 데이터 서비스 개발에 전력했지만 그 경제적 효용성이 벌써 의심받고 있다.

첨단 기술 분야에 너도나도 뛰어 들었다가 피 본 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세기 철도회사가 그랬고 20세기초 자동차와 라디오가 그랬다. 무한한 발전 가능성에 혹해 돈을 쏟아 부었던 수백개 업체는 수년내 모두 도산하고 결국 이익은 살아남은 극소수 회사에게 돌아갔다. 어찌 보면 낭비 같지만 시장의 자유경쟁을 통해 승패가 가려지기 전까지는 어떤 회사, 어떤 테크놀로지가 소비자의 욕구를 가장 잘 충족시켜 차세대 통신시장을 지배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가 져야 날아 오른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옥석이 가려지는 법이다.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를 자본주의의 요체로 파악했다. 창조적 기술혁신을 통한 낡은 기술의 도태를 통해 사회는 발전하며 자본주의만이 그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 통신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창조와 파괴는 자본주의의 특징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후세 에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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