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침식사

2001-05-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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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혜

가게문을 열기 무섭게 매상체크와 옷 정리, 손님 관리하랴 바쁘게 돌아치다 보니 어느새 10시다. 배도 고파오고 틈도 났기에 부엌으로 내달렸다. 집에서 끓여온 순두부찌개를 데우고, 깍두기랑 멸치볶음 등을 꺼내 막 첫 숟갈을 떨려는 찰나였다.

"똑똑" 유리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식사시간인줄 어떻게 알았을까.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유리문 너머로 낯익은 단골손님 하나가 세탁물을 한 보따리 안고 애교스런 웃음을 짓고 있다. 순두부찌개는 맛있게 끓고 있는데!

숟가락을 내려놓고 프론트로 내달았다. 지난 번 물빨래한 셔츠에 단추 2개가 떨어졌으니 잊지 말고 달아달라, 아끼는 수트에 립스틱 스팟이 묻었으니 꼭 좀 지워달라 등등 주문이 구구하다. 손님을 보내고 나서 다시 부엌으로 달려간다. 냄비뚜껑을 열고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순두부찌개를 급히 몇 숟갈 뜨고 있는데, 또 바깥에서 기별이 온다.


"똑똑똑" 다시 프론트를 향해 백 미터 달리기를 한다. 떠버리 손님 그린 씨다. 절망이다. 이제 족히 10분은 꼼짝없이 그의 인생철학강의를 들어야 할 판이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 나는 오늘도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행복하다는 사람. “살아있는 것보다 더 즐겁고 멋진 일이 어디 있습니까, 미스 그레이스? 그 이상을 바라면 욕심이지요. 오늘도 우리는 저 공중의 눈부신 태양과 햇볕에 빤짝이는 잎새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나는 그 소리조차 들너본 지 오래다), 보리밭 푸른 물결 위로 비상하는 종달새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하하”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웃는다. 다행히도 오늘 강의는 그쯤에서 끝났다. 차안에서 틴에이저 딸이 기다리고 있다면서 허둥지둥 나갔다. 그린씨를 쏙 빼어 닮았다는 딸, 아버지를 닮았다는 사실에 잔뜩 화가 나있다는 그 딸이 정말 고마운 순간이었다. 고맙다 딸아!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부엌으로 질주했다. 급한 김에 찌개냄비 속에다 밥과 깍두기, 멸치볶음, 고추장 등을 한꺼번에 넣고 마구 버무렸다. 어차피 속에 들어가면 다 섞여버릴텐데 뭘. 즉석 순두부비빔밥이 만들어졌다. 한 숟갈 떠먹으니 맛이 그만이다. 그런데 또 누가 문을 두드린다.

이번엔 "쾅! 쾅! 쾅!"이다. 되게 급한 모양이다. 이건 도대체 밥을 먹으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에이, 차라리 안 먹고 말지! 투덜대며 프론트로 내달린다. 유리문 밖에는 브릭스라는 이름의 여자가 음침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문을 열어주니, 그저껜가 찾아갔었다는 크림색 블라우스 하나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 블라우스 좀 봐요! 때가 하나도 안 빠졌잖아요!”가만히 살펴보니 얼룩이 너무 오래되어서 이미 직물 표면에 염색이 된 상태였다. 일단 죄송하다고 사과한 후, 플랜트에 다시 한 번 더 보내서 세탁하게 할 테니 옷을 놔두고 가라고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브릭스는 여전히 공격적이다. 엉터리로 옷을 클린하는 세탁소에 더 이상 자신의 소중한 옷을 맡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 세탁비를 돌려달란다. 뻔한 수작이다. 공짜세탁을 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 세탁물 접수해서 택 찍고 분류하고 클린하고 프레스하고, 또 어셈블리 배깅을 거쳐 컨베이어에 집어넣는 세탁공정에서 소비되는 비용은 누가 지불한단 말인가? 우리가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그렇게는 안됩니다. 손님. 우리도 그 블라우스를 클린하기 위해 지출한 게 있으니까요. 그러지 말고 가먼트를 일단 여기 놔두고 가시죠”단호하게 나오자, 여자가 갑자기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더러운 차이니스 어쩌고 하더니, “Go back to your country!” 하고 고함을 치는 게 아닌가! 순간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내뱉어 버렸다.

“당신이나 아프리카로 돌아가시지!”아차, 금방 후회했다. 욱하는 김에 한마디했지만, 이거 손님에게 예의가 아니다. 그렇지만 손님도 너무했지. 같은 이민자 처지에 무슨… 아프리카로 돌아가라는 내 말에 여자는 손에 들고있던 블라우스를 내 앞으로 휙 집어던졌다. 옷은 내 왼쪽어깨를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발등에 걸쩍대는 블라우스를 털어서 옷걸이에 걸며, 여자에게 이틀 후에나 찾아가라고 시치미를 뗐다. 당신이 먼저 시작하지 않았느냐고 변명까지 하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여자는 쌩하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프론트에 얌전하게 기다리고 서서 우리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것을 관망하고 있던 다른 손님하나도 뒤따라 나가는 게 아닌가! 동족애가 무척 강한 손님인가 보다. 한 보따리 안고 있었는데…

기운이 쑥 빠져버렸다. 여태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이게 무슨 꼴인가! 패잔병처럼 터벅터벅 부엌으로 되돌아온다. 찌개비빔밥은 싸늘하게 식어있고 입맛도 떨어졌다. 밥 한 그릇 비우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오늘따라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부엌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먹다만 찌개냄비를 스토브 위에 다시 올려놓는다. 냄새가 플라스틱 백에 베지 않도록 환풍기를 털어놓고 음식을 데운다. 냄새가 백에 스며들면 쉽게 날아가지 않는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더운밥과 국을 고집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산 밥벌레다. 정오나 되어서 냄비 속에서 반쯤 떡이 되어버린 순두부비빔밥을 허겁지겁 먹는다. 매운맛과 열기 때문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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