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숨겨진 사랑’

2001-05-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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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숙(토렌스)

초겨울 짧은 해가 설익은 오렌지색으로 변하며 석양의 꼬리를 아직 감추지 못하고 서성일 무렵, 우리집에 탐스런 꽃바구니가 배달되는 이변이 생겼다. "어머나, 이게 웬 꽃바구니야?"

난 놀라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안개꽃이 둘레를 감싸고 가운데엔 빨간 장미가 수십 송이, 너무나 아름답게 자태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날이 결혼 사십 주년 기념일이란게 생각났다. 누굴까, 꽃을 보낸 사람이? 궁금한 마음에 황급히 바구니 속을 살펴보았다. 곱게 접은 귀여운 카드를 발견했다.

"아버지 어머니 결혼 기념일을 축하드려요"


너무나 낯익은 큰아들의 필체였다. 큰소리로 기뻐서 떠들고 있는 나를 멋적은 듯 바라보며 웃고 있는 남편을 보니 아침 일이 떠올랐다. 아침에 급한 볼일이 있어 들린 아들을 잡고 잔디밭 한쪽 끝에서 남편은 무엇인가 수군거렸다. 부자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여 무심히 보아 넘겼는데, "돈은 나중에 내가 줄께" 하는 소릴 들은 것 같았다. 무슨 일예요, 물어도 별거 아니라고 남편은 얼버무렸다. 교통 위반 티켓을 받았나, 아니면 세금이 밀렸나? 종일 마음이 쓰여서 좀 불안했다. 아! 꽃을 부탁했던 모양이구나. 비로서 눈이 환히 뜨이는 것 같았고, 순간 남편이 괘씸해졌다.

누가 꽃 사 오랬어? 사십 년만에 처음으로 주는 꽃 한 송이를 자기 스스로 못하고 아들에게 부탁을 해? 난 남편에게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바쁜 아이에게 무슨 그런 부탁을 해요, 자기가 못하면 말 것이지" 이 말이 내 입에서 나간 순간부터 아름답던 꽃바구니는 생명을 잃은 종이처럼 보기 싫어져서 식탁 한 귀퉁이에 밀어 놓았다. 분위기가 냉랭해지니 식구들이 다 자기 방으로 흩어졌고, 아내의 바가지에 놀란 그이도 방문을 닫고 말았다. 축제일처럼 들뜨고 행복하던 집안이 갑자기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고 쓸쓸해졌다.

남편은 평생 처음 젊은이 흉내를 좀 낼까하다가 내게 면박을 맞은 셈이었다. 아이들 사는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머리가 허옇게 세어 가는 노친네가 안쓰럽고 미안하여 늦게나마 사랑의 표시를 하려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왜 자기가 직접 못해? 그렇게도 용기가 없단 말야. 난 고맙기 전에 화부터 났다.

그의 장미꽃 선물이 구박덩어리로 변해 버렸으니 그이도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한 모양, 방문을 닫고 아무 기척도 없었다. 난 혼자 식탁 옆에 앉아 구석으로 밀어놓았던 꽃바구니를 앞으로 끌어 당겨 유심히 보았다. 말없는 꽃이 뽀얀 안개 속에서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꽃잎에 남편 얼굴이 싱긋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때 그이의 아주 무잎처럼 싱싱하던 청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이 당신 생일이지" "오늘이 결혼기념일 아냐"

그의 뜨겁던 정열이 훅훅 끼쳐오면 얼굴을 붉히고 황홀하던 그 시절이 새삼 생각났다. 일에 지치고 시간에 쫓겨 행동으론 할 수 없던 이민의 삶, 그 동안 남편은 마음으로 얼마나 여러 번 꽃바구니를 보냈는 줄 아느냐고… 그랬구나, 나는 슬픈 후회로 가슴이 저려왔다. 그이의 수줍은 사랑 고백이 새삼 은근하고 격이 높아 보였다. 젊은이들처럼 조청처럼 달고 짜릿거리지는 않아도, 에밀레종 소리같이 은은하고 깊은 숨겨진 노년의 사랑은 숭고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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