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맨해턴 노조데모가 의미하는 것

2001-05-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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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 <주필>

뉴욕 맨해턴 다운타운에 자리잡은 N 델리마켓. 30여명의 히스패닉이 몰려와 소리소리 지른다. "보이콧! 보이콧! 보이콧!" 가게 앞에는 경찰관들이 출동해 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바리케이드도 준비 해놓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샐러드가 아무리 신선하고 샌드위치가 맛있다 해도 손님들이 점심 먹을 기분이 날까 의심스럽다.

"노조원들이 우리 가게 앞에서 데모한지가 11개월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피켓을 들고 소리를 질러대니 당하는 업주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저 찾아와 주는 손님들에게는 눈물겹도록 감사할 뿐입니다."


N델리의 주인 한상금씨의 한숨 섞인 말이다.

"어떤 때는 너무 분해서 잠을 못 이룰 때도 있어요. 여자의 몸으로 내가 이 가게를 키워 놓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좀 숨을 돌릴 만하니까 노조 데모대가 들이닥쳐 내 사업을 망쳐 놓고 있으니…"

맨해턴에는 델리 그로서리 마켓이 약 2,000개 있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이다. 한씨의 N델리는 샐러드 바와 2층 간이식당까지 갖추고 있는 큰 규모의 가게다. 데모대의 목표는 큰 가게부터 공격해 항복을 받으면 나머지 작은 가게들의 협조를 얻기가 쉬울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데모대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노조를 인정하겠느냐, 아니면 가게문을 닫겠느냐다.

"생각해 보세요. 잘못한 것이 있으면 노동청에 고발해 시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절차 아닙니까. 이건 그게 아니에요. 종업원들을 노조에 가입시키라고 데모하는 겁니다. 미국이 이런 나라인가 싶어 정이 떨어지기까지 합니다."

맨해턴의 델리 가게나 청과상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럽게 놀란 것은 멕시칸 종업원이 예상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인가게 앞에서 데모하고 있는 노조의 명칭도 로컬 169, 일명 ‘멕시코계 미국인 근로자 협회’로도 불리고 있다. 멕시칸 노동력이 LA뿐만 아니라 뉴욕 한인사회에도 깊이 파고 들어와 있다.

왜 멕시칸들을 고용하는가. 한인들을 고용하면 이런 일도 없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한인 상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인들은 뉴욕에서 시간당 5달러15센트 최저임금 받고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돈 받아 가지고는 아파트 렌트도 안되거니와 이젠 눈이 높아져서 막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전에는 푸에르토리칸을 고용하기도 했었으나 집중력이 떨어져요. 그러다 보니 멕시칸 등 남미계가 한인상가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한인 상인들은 자신들이 노조에 대해 너무 몰랐으며 멕시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우고 있는 셈이다.

미국인들도 델리를 하고 있지만 이들은 원리원칙대로 가게를 운영해 노조가 데모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반면 코리안들은 인간적인 것만 강조하다보니 서류정리가 엉망일 수밖에 없고 이 틈을 노조가 비집고 들어와 공격적인 데모를 벌이고 있다.

뉴욕에서 일어나고 있는 남미계 노조의 데모는 코리안들에게 뼈아픈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주먹구구식으로 장사하지 말라."

원리원칙을 지키고 모든 것을 문서화하는 상거래 문화가 한인들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인정에 끌려 캐시로 봉급을 주는 풍토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

4.29폭동 1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 한인 상인들에게 라틴계가 여기 저기서 불만을 노출시키고 있는 현상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새로운 위기의 잉태로 해석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는 의미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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