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쫓기는 자와 쫓는 자

2001-05-04 (금)
크게 작게

▶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PBS의 ‘네이쳐’ 프로그램은 가장 인기 있는 프로의 하나다. 대자연속에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동물들이 벌이는 생존경쟁은 처절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동물 프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맹수와 초식동물간의 추격전이다. 치타와 산양의 쫓고 쫓기는 모습은 언제 봐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동물간의 추격 못지 않게 관심을 끄는 것이 경찰과 범인의 추격전이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길거리에서 경찰이 범인을 쫓는 장면이 나오면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이를 지켜본다. 짧게는 수백만년, 길게는 수억년에 걸친 진화과정을 통해 몸에 밴 본능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적이 나타났을 때 싸울 것이냐 도망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판단력은 그 생명체의 생존여부와 직결돼 있다. 한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대대로 자손이 끊길 수 있기 때문이다. TV 카메라가 경찰 추격전만 벌어지면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생중계하고 액션물에 예외 없이 카 체이스 장면이 등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2일 경찰에 쫓기던 범인이 버스를 탈취해 도주하다 세워 놓은 차를 들이받아 1명이 죽고 7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버스는 LA 한인타운을 관통하는 올림픽가를 거쳐 다운타운까지 갔다 사고를 냈다. 한인이 다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경찰의 추격전으로 애꿎은 피해자가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경찰이 차로 범인을 쫓을 경우 10번에 3번은 사고로 끝난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2년전 시미 밸리에서 결혼식장에 참석하고 집에 가던 한 젊은 여성(20)이 경찰차의 추격을 피해 시속 110 마일로 도망가던 14살짜리가 몰던 차에 받혀 중상을 입은 적이 있다. 이 여성은 이 사고로 얼굴뼈가 모두 부서져 엉망이 됐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뇌에 영구 손상을 입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됐다. 이 여성은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소년을 단속하려던 경찰이 무모한 추격을 벌여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며 경찰의 추격 지침을 엄격히 할 것과 200만 달러의 손해배상금 지불을 요청하며 소송을 청구했지만 결국 32만 달러만 받고 소송을 종결했다. 이 여성의 밀린 병원비만 50만 달러가 넘는다. 현행법은 어느 한도로 도주하는 용의자를 추격할 것인지에 대해 거의 전적인 재량을 경찰에 주고 있다.

범인이 도망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추격해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딜레마는 딜레마다. 그러나 ‘100명의 죄인을 놓아주는 한이 있어도 1명의 무고한 시민을 가둬서는 안된다’는 격언이 있듯이 경찰은 범죄자 체포보다는 항상 시민의 안전을 먼저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