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심청전’과 가정의 달

2001-05-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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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 <주필>

인간이 가지는 최대의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성욕이나 물욕이나 명예욕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색깔이 바래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죽음의 공포도 이겨내는 감정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의 위기를 목격했을 때라고 한다.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헤엄못치는 아버지가 강물에 뛰어드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초월한 경지다. 자식은 부모에게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주기 힘들지만 부모는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이기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부모님 날 낳으신 은혜…” 운운은 우스운 소리가 되어 버렸다. 미국 유학까지 마친 대학교수가 재산을 탐내 아버지를 살해하는 끔찍한 세상이다. 독일국민들이 윤이상씨를 악성으로 떠받드는 이유는 서구문명이 찾지못한 예(禮)를 윤이상씨가 음악으로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 ‘심청전’ 마지막 장면에서는 심봉사만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잔치에 참석했던 장님 노인 모두가 눈을 뜨는 것으로 되어있다.
“아버지 내가 물에 빠진 심청이오. 심청이 살아 있으니 어서 급히 눈을 뜨고 딸의 얼굴을 보옵소서” 하는 심청이 목소리에 심봉사가 놀라 “아따 이게 왠 말이…” 하는 순간 광명을 찾게 된다. 원작에서는 심학규 봉사만 눈을 뜨지만 윤이상의 오페라에서는 모든 장님이 눈을 뜨면서 “대명천지 새로워라. 지화자 좋을시고. 만세 만세 만만세”를 합창으로 부른다. 뮨헨 올림픽 전야제에서 ‘심청전’이 공연되었을 때 독일관중들은 너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서양이 잃고 있는 인간관계 회복을 ‘심청전’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기 고장의 자랑으로 ‘효’(孝)를 심벌로 내세우는 도시가 있는데 바로 수원이다. 수원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다. 정조대왕이 뒤주에 갇혀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얼마나 지극히 생각했는가 하면 “모처럼 능참봉 한번 했더니 한달에 출두가 29번”이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어떤 달 한양에서 수원까지 29번 찾아가 사도세자 능을 참배했는데 능 근처의 소나무에서 송충이가 들끓자 살아있는 서너마리를 삼키는 것으로 능지기를 간접훈계 했다고 한다. 당시 임금의 묘를 지키는 능참봉은 관리중에서 제일 한가하고 좋은 자리였으나 정조 시절의 능참봉은 목숨을 걸어야 했었던 모양이다.


‘효’는 한국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효도는 자식쪽에서 알아서 해야지 부모들인 우리가 목청 높여 강조하기에는 좀 어색한 데가 있다. 첫째 “자식시절 나부터 부모에게 효도했나” 하는 양심가책도 있고, 둘째 옆구리 찔러 자식에게 절을 강요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셋째 “내가 너에게 베풀었으니 너도 갚아야 할 것 아니냐”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아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효를 말하기는 쉬워도 자식에게 가르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효’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범에 의해서 자식에게 가르쳐져야 한다.

인간은 성장하면 1인2역을 해야 한다. 부모에 대해서는 내가 자식이지만 동시에 나는 자녀를 둔 부모이기도 하다. 요즘 성인들을 보면 부모로서는 기가 막힐 정도로 자식에게 잘하는데 자식으로서는 너무나 “아니올시다”다. 식당에 가봐도 아이들 데리고 온 사람은 많으나 부모님 모시고 온 사람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이먹으면 “자식 길러 놨더니 아무 소용없더라”며 섭섭해한다. 젊은 시절 자기가 효도하지 않았으면 자식에게 기대하지 말던가 아니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지금이라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자식들에게 보여줄 일이다.

우리들의 부모님세대는 효를 하고 효를 바라는 세대에 속하고 우리 자식세대는 효를 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세대다. 그런데 우리는 ‘효는 하지 않고 효를 바라기만 하는 세대’가 된다면 몰염치 세대로 불릴 것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부모들부터 효의 시범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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