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

2001-05-0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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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재수 (금강사 법사)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란 말이 불경에 나온다. 이를 테면 눈으로 보고 읽고 귀로 듣고 육체로 얻은 지식경험 철학등이 모두 다 밖에서 얻어드린 것들이며 나의 내부에서 얻어드린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모든 지식이나 체험은 따지고보면 허한 것이나 빈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내 육체가 붕괴되는 죽음에 이르면 나의 지식, 기억력등이 다 사라지고 만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탄생서부터 죽음까지 내가 뭔지,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현상 세계와 나를 조명해 보면 비로소 "나"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해서 부처님께선 무아(無我)란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럼 우리의 아의 본체(ego-entity)는 어디 있는가?

나의 최상의 지식에 의하면 어느 종교도 이 "我"의 문제를 제시한 종교는 없다고 본다. 우리의 의식이나 마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잡념이거나 의식의 흐름이다. 이것을 불교에선 아뢰야식(Alaya Vijnana)이라 부른다. 이것은 일체 종자식(種子識)이란 별명을 갖고 있고 그 속에 업(業)의 열매인 종자를 간직하고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생사유전하는 재탄생의 주체로 보는 학자도 있다.


어떻든 이것의 방해로 우린 마음이나 전신속으로 깊이 들어설 수 없다. 허나 불교는 실천의 종교이다. 도를 닦는 수레에 올라타야 한다. 다시말해 삼승사과의 해탈의 길에 나서야 한다. 그 길은 "마하 판야 파라밀타"의 길에 서는 일이다. 마음을 비우고 높디높은 지혜를 얻고 그것을 완성하는 길에 나서는 일이다. 그러러면 나라는 얼굴, 나는 남과 다르며 그들과 비할 수 없다는 그런 얼굴을 버리고 분별심마저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두터운 벽인 그 복잡한 의식이나 잡념에서 해방되고 그곳을 뚫고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된다. 황하의 모래 하나에도 우주가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도 우주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높고 위대한 진실을 전하신 부처님을 우리 동양인만 아니라 서구의 지성인들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국의 저명한 철학가이며 수학가이신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크리스천이 아닌가?" 란 저서에 이렇게 쓰고 있다. 지혜의 문제에서나 공덕의 문제에서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 저명한 사람들보다 높이 서 계신다-나는 이런 점에서 부처를 그보다 위에 높고 싶다.

그런가하면 T.S. 엘리엇은 "사중주"란 시에서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불교의 본성은 모든 미신에서 자유롭고 현대의 지성인과 문명인에게 가장 알맞는 것이다." 불교는 마침내 물결의 수레를 타고 열반(nirvana)의 세계로 향하는 일이며 열반이야말로 인간구원의 길인 것이다. 열반에 이르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에 들어서며 변화무상한 현상세계를 넘어서서 변함 없는 영원에 이르고 늘 희열에 차고, 진아(眞我)을 갖고 언제고 깨끗하고 맑고 고요의 세계에 들어선다.

이러한 위대한 진실을 우리에게 전하신 부처님의 탄생이 4월초8일이다. 어찌 이날을 우리가 반갑게 맞이 아니 할 수 있을까. 평화와 진리를 전하신 부처님은 이리하여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따라서 우린 부처를 여래(如來)(Tathagata)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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