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계화와 그의 적들

2001-05-0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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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코노미스트

▶ 민경훈 <편집의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동서양의 성현들은 예로부터 이름의 가치를 중시했다. 짧은 인생을 돈이나 권력, 쾌락을 추구하며 낭비하기보다는 뭔가 값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항상 이름이 남는 것은 아니다. 지금 미국 최대 작가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모비 딕’의 저자 멜빌도 죽은 뒤 수십 년 동안 잊혀졌다 우연한 기회에 재발견 빛을 보게 됐다.

업적에 비해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대표적 경제학자의 하나가 프레데릭 바스티아(1802-1850)다. 자유무역주의의 우월성을 가장 명쾌하게 설파한 운동가였던 그는 가치의 주관주의, 한계효용과 수확체감의 법칙등을 발견, 20세기 후반 세계 경제학의 주요 흐름인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정부의 시장개입이 왜 잘못인가를 밝히는등 케인즈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케인즈 학파의 오류를 예견했다.

그는 이런 학문적 업적외에 우화로 난해한 경제적 진리를 일반인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양초 제조업자들의 청원서’라는 그의 작품에는 낮 동안 무료로 나라 전체를 밝히는 햇빛 때문에 촛불 장사를 해먹을 수가 없으니 모든 시민으로 하여금 창문을 비롯한 모든 구멍을 꼭꼭 막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해 달라는 촛불업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할 경우 양초 생산의 증가로 인해 고용을 늘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세수도 늘어나니 일석이조가 아니냐는 것이다.


지난 주 자유선거에 의해 지도자를 뽑지 못한 쿠바를 제외한 미주 24개국 정상은 캐나다 퀘벡에 모여 북남미 전지역을 커버하는 자유무역지대 창설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물론 아직 협상과정과 의회의 인준절차가 남아 있지만 인구 10억에 이르는 전 미주를 포괄하는 자유무역 지대 창설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으로만도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2년전 시애틀에서 세계무역기구(WTO) 대회가 열렸을 때 당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캐나다 당국은 회의장 주변에 콘크리트 벽을 설치, 데모데들이 호텔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면을 쓰고 각목을 휘두르는 시위대원의 모습은 TV를 통해 전세계에 중계됐다.

대원 중에는 자유 무역을 이론적으로 반대하는 보호무역주의자부터 무역 확대가 환경을 해친다는 환경 보호주의자, 제3세계 국민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진보파 지식인, 노조 지도자, 무정부 주의자등 갖가지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세계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세계 정치판도에 이상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까지 진보와 수구로 나뉘어 으르렁대던 세력들이 이를 반대하는 데는 손을 잡고 나선 것이다. 진보파 지식인의 기수 랠프 네이더와 극우파의 표본 팻 뷰캐넌이 반세계화 운동에는 의기가 투합해 한 침대에서 짝짜꿍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권력을 축소해야 한다고 외쳐오던 무정부주의자까지 무역장벽을 높이는데는 국가의 힘을 동원하려는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다.

자유무역을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값싼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소비자와 경쟁력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다. 반면 손해보는 사람들은 자국 시장 독점을 노리는 재벌등 소수의 자본가와 생산성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양산업 종사자들이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양초업자를 살리기 위해 햇빛을 가려야 한다는 주장 못지 않게 어리석다.

자본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상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그는 상인들이란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돈을 벌기보다는 기회만 있으면 경쟁자를 배제해 독점이윤을 챙기려 하는 경향이 크다는 사실을 일찍이 꿰뚫어 봤다. 그가 자유무역을 주창한 이유중 하나도 외국의 경쟁자들을 배척하고 자국 시장을 독점해 손쉽게 돈을 벌려는 소수 자본가의 횡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커질수록 정치적 자유가 억압될 위험성도 커진다.

남아공과 가나등 아프리카에서 가장 민주화가 잘된 나라일수록 자유무역을 지지하고 수단, 짐바브웨, 리비아등 독재가 성행하는 나라일수록 이에 반대하고 있다. 작년 세계화 반대 압력단체들은 연방의회가 심의중이던 ‘아프리카 성장기회법’을 거의 부결시킬 뻔했다. 가장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들에게 관세 없이 의류품을 미국에 수출할 수 있도록 한 이 법이 가까스로 통과된 후 마다가스카르의 섬유수출은 120%, 말라위와 나이지리아 1,000% 늘어났다. 평생 일자리다운 일자리를 가져 보지 못한 이 나라 국민들이 처음으로 고정적인 수입원이 마련된 것이다. 무역 장벽을 높여 수출을 못하게 되면 가까스로 취직을 한 아프리카 인들이 다시 실업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아프리카에서 중남미와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후진국의 자생적 경쟁성장을 유도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당장 밥을 굶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환경이 어떻고 근로조건이 어떻고 해봐야 공염불에 불과하다.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덕을 보는 사람과 손해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곰곰이 돌아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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