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진 한 장에 담긴 뜻

2001-05-0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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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모 (언론인)

지난 4월14일자 한국의 조간 신문엔 ‘희한한’ 사진 한 장이 일제히 게재됐다. 김종필 이한동 김중권 김종호 김윤환씨 등 5인이 서울의 한 고급 일식당에서 한 잔 걸친 뒤 나란히 포즈를 잡은 사진이다.

필자가 이 사진을 가리켜 ‘희한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목하 이 나라 정치를 주무르는 범 여권의 실세들이라는 이들의 모임이 ‘3당 연합’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치고는 왠지 구차하고 왜소해 보였다는 점이다. 그런가하면 5인의 태생이 하나 같이 김대중 대통령(DJ) 계열 아닌 구(舊)여권의 ‘한 핏줄’ 이라는 점이 그 두번째 이유에 해당된다.

김종필씨--그에 관해선 이런 저런 설명이 불필요하다. 3공에서 ‘국민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 권력을 떠나지 않고 산 사람이다. 현 총리인 이한동씨로 말하면 5공화국 때 입신출세해 6공과 ‘문민정부’에서 고관대작을 지낸 이다. 집권 민주당의 대표위원직에 오른 김중권씨의 내력 역시 노태우 정권의 요직을 두루 거친, 입지전적 인물이다. 자민련 총재대행인 김종호씨 또한 그의 ‘온실 내력’을 빼고는 언급할 무게가 없다.


끝으로 김윤환씨--민국당 대표를 맡고 있는 그가 5인 그룹에 끼어있다는 건 차라리 코미디다. 5공과 6공의 거물 그리고 YS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인 그가 이회창씨로부터 내몰린 뒤 신당을 차려 여권의 한 귀퉁이를 잡고 있다는, 오늘의 한국 정치현실에 대해선 개탄하기도 지친 판이니 그저 "허허"하고 웃고 지나갈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종인지 스카치인지 몇 순배 ‘축배’를 들었음직한 상기된 얼굴들 밑에 붙은 사진 캡션이 걸작이다. "우린 한 배를 탄 사람들이다." 기사 내용을 보니 이런 말도 나온다. "어떤 풍랑이 있어도 우린 한 배를 타고 갈 거요"(JP), "돌다 돌다 보면 같이 모이게 되는 게 이치 아니겠소."(김윤환)
필자가 이 사진 한 장에 ‘의미’(?)를 주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이들이 탄 배의 ‘선장’은 누가 뭐래도 DJ다. 그는 지금 노구를 이끌고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일구월심으로 항해 키를 잡고 있다. 욕도 어지간히 먹어 가면서. 한데 이들은 말하자면 그 배(공동정권)의 항진을 돕기 위해 고용된 ‘용병들’인 셈이다.

이들의 머리 속엔 과연 무슨 생각들이 가득차 있을까. 정권의 깃발 밑에서 ‘호신’을 잘 한 다음 차기정권의 주자로, 혹은 ‘킹 메이커’로 한 몫 단단히 하자는 생각들로 가득찬 것은 아닐까. "개혁이라고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요. 대통령님!"--속으로 이러면서 히죽 웃고 있는 이는 또 없을까.

이 한 장의 사진을 본 4인의 소회가 궁금하다. 먼저 김대중 대통령. "그래도 JP가 바람막이를 해주니 천만 다행이야."--아마 그런 생각도 했을 법하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엔들 왜 ‘다른 느낌’이 없었겠는가. "모아 놓고 보니 모양새가 좋지 않구먼. 맨 구 정권 얼굴들이네--"

따지고 보면 이 사진 한 장 속에 DJ 정권의 태생적 한계가 녹아 있다. 동교동계 등 친위부대에선 내세울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 ‘무늬’조차 비개혁적인 흘러간 옛 얼굴들을 전면에 배치하지 않고서는 정권을 유지해 나갈 수 없다는 정치현실을 놓고 왜 고뇌하지 않겠는가.

다음은 전두환과 노태우씨 쪽의 반응이다. "내 밑에서 큰 사람들이군. 내가 정치를 참 잘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YS의 논평은 어떤 것이었을까. "종필이 윤환이 한동이, 다 내 아덜(아이들) 아이가(아닌가). 참으로 DJ도 안 됐데이."

따지고 보면 그 날의 ‘명언’(?)은 김윤환씨의 말이다. "돌다 보면 모인다." 이 나라 정치인들의 사전에 지조, 기개, 강직, 신념, 이상(理想), 비전--이런 낱말들이 사라진지는 오래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새로 얼굴을 분장하고 나타나 "구국적 일념 어쩌구--"하는 게 우리의 정치판이다.

하기야 인생 자체가 유행가 가사처럼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인고로 뭐 요모조모 따질게 있느냐고 말한다면, 그리하여 배를 바꿔 탄 게 무슨 자랑인양 나대는 카멜레온의 정치인들에 표를 던지는 국민 수준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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