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희망의 힘

2001-04-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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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지난해 시드니 올림픽에서 특별히 인상에 남는 선수가 있었다. 여자 육상 1500m 결선에 진출한 말라 러년이라는 미국 대표선수였다. 올림픽에 출전할 정도면 한두가지 감동적 스토리 없는 선수가 없겠지만 러년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그는 앞이 안보이는 시각장애인이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은 아니었다. 9살때 망막퇴행성 질환을 앓으면서 시력이 나빠지다가 14살때부터는 거의 시력을 상실했다. 빛이 사라진 세상, 그 캄캄함에서 그가 삶의 의지로 택한 것이 달리기였다. 그가 겪었을 고초는 ‘내가 눈을 감고 달린다’ 생각해보면 상상이 된다. 수없이 넘어지고 부딪쳤다. 올림픽 출전 훈련중에만도 자전거에 치여 다리 부상을 당했고 대표선수 선발전에서는 다른 선수와 부딪쳐 탈락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렇게 힘든 여건에서도 그가 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뭔가 성취할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요즘 남가주는 원색의 꽃들로 눈이 부시다. 신기한 것은 화려한 색상과 대조적으로 향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을 겪지 않고 너무 온난한 기후에서 자란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같은 성과를 거두었어도 인생의 ‘겨울’을 이겨낸 사람에게는 역경없이 성공한 사람에게 없는 독특한 향기가 있다.


이번 보스턴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승리한 이봉주 선수도 그런 향기를 지닌 사람중의 하나로 보인다. 그는 유난히 좌절과 역경이 많았던 선수로 꼽힌다. 짝발, 짝눈으로 신체적 조건에서 우선 어려움이 있고 선수로서의 운도 자주 비켜갔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해 시드니 올림픽이었다. 황영조 선수 그늘에 가려 빛을 못보다가 “이보다 더 혹독한 훈련을 해본적은 없다”며 자신하고 나갔던 대회였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경기도중 다른 선수 발에 걸려 넘어져 24위로 추락하는 불운이었다. “이봉주는 끝났구나”하는 것이 세인들의 평가였다.

세상사람들의 평가가 너무 성급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그는 몸으로 증명했다. 숱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를 오뚝이처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무엇일까. “흘린 땀과 이겨낸 고통만큼 결실을 맺는다”는 신조라고 그는 말했다. 땀과 고통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이 마침내 그를 승리자로 만들었다.

각 대학 합격통지 시즌이 끝나면서 주위에 상심한 가족들이 있다.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때는 입시생 가족 집에 전화하지 말라던 것이 이제 한국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입시 경쟁이 점점 치열해져서 대학 입학문제로 좌절하는 학생들이 생기고 있다. 그 아이들에게는 대개 생애의 첫 좌절일텐데 너무 곱게 자란 세대여서 꿋꿋이 이겨낼지 불안하다. 남가주의 꽃들처럼 ‘겨울’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다.

인디언들은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는 것은 웃는 것과 똑같이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성취와 성공에 너무 초점을 맞춘 우리 사회는 실패나 좌절 같은 그 반대의 상황들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 실패나 좌절도 인생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므로 담담히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자세를 아이들에게 너무 가르치지 않는다.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차 있지만 대신 또 그걸 극복해내는 일들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라고 헬렌 켈러는 말했다. 역경은 극복의 대상일 뿐이라는 말이다.

유태교 성전에서는 등불을 끄지 않고 밤낮으로 불타게 하는 전통이 있다. 박해의 민족 유태인들은 그 등불을 밝히는 올리브유에서 교훈을 얻는다고 한다. 올리브 기름을 얻으려면 열매들을 돌로 으깨고 짓눌러서 짜야 하고 그렇게 짜진 기름이 마침내 등불을 밝힌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짓눌리고 으깨지는 역경을 이겨내면 오히려 강인한 정신력이 생겨서 세상을 밝힐 수 있다는 교훈이다. 고통의 과정을 견딜수 있는 것은 그것이 빛나는 등불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장거리 경주다. 멀리 보는 눈이 필요하다. 당장 앞을 가로막는 절벽 그 너머를 보게 하는 것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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