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 뒷이야기

2001-04-1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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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 칼럼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전직 대통령들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것은 권력의 무자비한 속성이다. 어제까지 칼자루 잡았던 사람이 오늘은 칼날을 잡고 있으니 극에서 극이다.

인간세계는 두 개의 의지가 있다. 올라가는 의지와 내려가는 의지다. 정치인은 올라가는 의지에는 강해도 내려오는 의지에는 약하기 마련이다.

특히 김영삼 전대통령의 경우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미는 것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현직 대통령인 DJ를 계속 “김대중이가…”로 호칭하면서 “두고 보이소. 말로가 비참할 겝니더” 라고 서슴지 않고 단정했다. “왜 그렇게 DJ에 대해 심하게 이야기하느냐”고 물으니까 “그 친구가 정치보복을 안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내 동창들(경남고)을 모조리 감옥에 보냈다”고 억양을 높였다.


YS는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어떤 형태가 되든 간에 자신이 후보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대통령을 꿈꾸고 있는 정치인은 이 김영삼의 문턱을 지나지 않고는 부산과 경남표를 얻기 힘들 것”이라는 메시지를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했다. 이인제씨가 찾아와 큰절하고 이회창씨가 YS를 만나기 위해 왜 집밖에서 몇 십분씩 기다리는 수모를 참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에 비해 노태우 전대통령은 YS와 대조적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위해 2층 거실에서 아래층 응접실로 내려오는데도 정장을 하고 있었으며 제일 먼저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다. 노태우씨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그 분”이라고 깍듯이 불렀으며 백담사 사건에 대해 아직도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남북회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미국의 의심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인터뷰를 신청했으나 “지금까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청와대에서 물러난 후 기자와 만난 적이 없다”면서 거절했다. 그는 DJ를 칭찬할 수도 없고 추징금 집행 때문에 현 정부를 비난할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것이 그를 아는 정치인들의 이야기였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지나칠 정도로 말조심을 했다. 아침 8시에 만난 것에서부터 식당에서 예정되었던 방을 바꾸고 다른 방으로 옮기는 등 보안에 무척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요즘 세상에도 기관원이 도청하느냐”고 물으니까 보좌관이 “그럼요”라고 대답한다. 이회창씨는 자신이 국민들에게 싸움닭처럼 비치는 것을 경계했으며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내가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이것만은 꼭 써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정치에서 보복정치가 없어야 되고 자신은 신념을 가지고 보복정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회창이 집권하면 무자비한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척 아픈 모양이다.

민주당의 이인제 최고위원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참모들이 충고했다고 한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못 받으면 또 뛰쳐나올 작정인가”라고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말은 “탈당 않겠다”가 아니라 “후보지명에 자신 있다”는 뜻이었다.

이회창씨와 이인제씨는 ‘3김 청산’에 관한 의견을 물으면 “그분들도 업적이 많고…” 운운하면서 우물우물 피했다. 이들은 3김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다음 선거에서 표 떨어질까 봐 우려하는 표정이 뚜렷했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다음 선거에서도 또 3김의 영향력이 당락을 좌우할 것이다.

“너를 살릴 힘은 없어도 죽일 힘은 있어.” 이것이 3김 파워의 메시지다. 지루한 ‘3김 시대’는 언제 막을 내릴 것인가. 한국 민주정치의 숙제다. 왜냐하면 민주정치는 투표이고, 투표가 있는 한 3김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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