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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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목격자

2001-04-1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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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란(LA카운티 검사)

미스터 도와 미세스 도는 고교시절 애인 사이로 결혼까지 골인, 두 아들을 두었다. 행복했던 두 사람 사이에 몇년 뒤 금이 생겼다. 미스터 도가 바람을 피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까지는 가지 않았다. 미스터 도가 관계를 청산했고 두 사람은 전문가의 카운슬링을 받았다. 그 후 몇 년은 무사히 지나갔다. 그런데 미스터 도가 와이프 몰래 또다시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미세스 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용서고 화해고 없었다. 미세스 도는 두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 친정부모의 집으로 갔다.

미스터 도는 새 애인과 열애에 빠진 나머지 와이프가 집을 나가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어느 정도 시들해지자 미세스 도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다시 화해하자고 애걸하는 정도였다. 미세스 도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었으나 미세스 도는 완강했다. 그러자 직장에 가는 그녀를 따라가거나 몰래 뒤쫓았다. 미세스 도가 끝까지 화해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미스터 도는 난폭해졌다. 만약 이혼하려고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협박편지를 보냈다. 협박전화를 건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집 앞을 수시로 차를 타고 왔다갔다했으며 출퇴근길에도 따라 다녔다.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미세스 도는 미스터 도가 자신을 위협하고 뒤쫓아 다닌 일 등을 모두 기록, 이를 토대로 접근금지 명령을 법원에 신청했으나 아직까지 부부 사이라는 이유로 기각 당했다. 미세스 도는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이 우려된 나머지 이혼신청을 했고 서류가 미스터 도에게 전달됐다.


어느 날 밤 미스터 도는 미세스 도가 이웃집 앞에서 이웃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 남자는 미스터 도도 잘 아는 경찰관 J로 미세스 도 친정부모와 친한 사이였다. 미스터 도는 반마일쯤 떨어진 곳에 자신의 차를 주차한 뒤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몰래 접근했다. 미세스 도 친정집과 J경찰관 집은 한인 김모씨의 집을 사이에 두고 한집 건너에 있었는데 김씨 집 드라이브 웨이에는 항상 대형 유틸리티 트럭이 주차돼 있었다. 미스터 도는 이 트럭 뒤에서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오더니 J가 미세스 도를 집에까지 바래다주는 모습이었다. 와이프와 J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 미스터 도는 전기설비를 덮어두는 시멘트 블럭을 집어 들고 있다가 두 사람이 트럭 옆을 지나가는 순간 덮쳤다. 먼저 J의 머리를 블럭으로 강타한 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와이프를 쫓아가 뒷머리를 쳐 쓰러뜨렸다. 첫 가격으로 미세스 도의 두개골이 깨지고 의식을 잃었지만 미스터 도는 다시 블럭을 들어 쓰러져 있는 그녀의 머리를 거듭 강타했다. 주변은 금방 피바다가 됐다. 쓰러져 있던 J가 도움을 외쳤다.

집안에 있던 한인 김씨가 도움을 외치는 소리를 듣고 911에 신고를 했다. 그러나 911 교환수는 김씨의 서툰 영어와 액센트로 말미암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김씨가 차량 절도를 당한 것으로 여겼다. 긴급을 요하는 살인사건 대신 절도사건으로 알고 느긋하게 경찰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이 모두 숨진 다음이었다.

익명으로 설명했지만 위의 이야기는 모두 실제 상황이고 미스터 도는 살인혐의로 LA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그동안 미세스 도가 기록해 두었던 미스터 도의 협박내용 덕분에 이 사건이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계획된 살인이었다는 것이 입증됐다. 미스터 도는 1급 살인혐의 유죄평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망한 피해자가 적어 두었던 기록이 증거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OJ 심슨 사건 이후 캘리포니아주 형법이 개정된 덕분이다. 피살당한 심슨의 전부인 니콜이 심슨이 자기를 구타하고 죽이겠다고 위협한 사실을 기록해 두었지만 당시에는 증거로 채택될 수가 없었다.

처음에 나는 한인 김씨가 911 교환에게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실망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김씨가 매우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지만 911에 신고를 해 도움을 청한 점이 용감했다. 한인사회에서는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범죄를 목격하고도 신고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김씨는 사건을 보고 등을 돌리지 않았다. 비록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김씨의 케이스에서 우리는 비록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도움을 청해올 때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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