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태극기 스티커

2001-04-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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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탁제 <글렌데일>

이민 오기 전 일이었다. 미국 유학 길에서 귀국한 친구와 마주 앉은 술좌석에서 토로하던 말이다. 어느 날 한국에서 원정 왔다는 선수들을 응원하러 경기장에 들어섰고 이어 태극기가 오르고 애국가 연주되는 찰나 유학생활 4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야릇한 심정은 끝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볼에 눈물이 고이게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 친구의 지지하고 솔직한 애국심에 관한 고백을 나는 덤덤히 받아 넘겨 "향수병이겠지!"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들겼다.

지금 나는 상황이 바뀌어 내 자신이 그 친구가 애절하게 보고 느꼈다는 태극기 앞에 서게 되면서 깊은 향수병을 깨닫게 되었다. 병치고는 참으로 무어라고 시원하게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병임에는 틀림없다. 때로는 증오도 해 보던 조국. 때로는 미워도 해 보던 동포. "그러니까 우리한국 사람은 안 돼!" 스스로 내 뱉는 자학증세가 이민 생활에서 완연히 사라지고 마는 까닭은 생소한 민족들 틈에 끼여 고달프게 살아가다 보면 느껴지는 뿌리에 대한 향수가 아니겠는가.

태극기는 우리 뿌리의 상징이다. 때로 우리는 신호등 앞에서 잠시 차를 멈추게 된다. 무심결에 눈에 띠는 앞 차 뒤의 스티커는 생소한 남미국가의 국기, 나는 진지하게 스티커를 응시한다. 자기들의 미미한 존재 여부에 개의치 않고 보란 듯이 우직스럽게 붙이고 다니는 그들의 열정적인 표정! 동기야 어찌되었든 내 나라국기를 과시하고 다닌다는 그 사실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운다. 더구나 내 나라 태극기 스티커를 어디서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기에 이들 앞에서 마음이 우울해 진다. 의식적인 애국심의 발로가 아닐지라도 이들은 분명 애국자로 돋보인다.


요즘 부쩍 매스 미디어를 통하여 들려오는 애국애족 운동의 일환으로 사랑운동이 많다. "나라사랑" "무궁화사랑" "내 고향 내 모교 사랑" 등등 유심히 보면 이렇듯 진지한 사랑 모임이 당위성을 떠나 몇몇 뜻맞는 지인끼리 사랑을 주고받을 뿐 좀처럼 모두에게 와 닿지 않고 있음을 목격한다. "나라사랑 운동" 보다 더 고귀한 사랑이 또 있겠는가.

어느 날 우연히 한 잡화상에서 애써 찾던 태극기 스티커(한국어 표식은 없고)를 입수했다. 다음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한 히스패닉 동료가 다가와 물었다. "이 스티커 너의 나라 국기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 미국서 오래 사는 동안 처음 보는데... 그런데 국명이 없지 않나..." 나는 기분이 좀 상했다. "이 사람아, ‘88 올림픽도 못 봤나!" 멋 적은 표정으로 돌아서 가는 그의 등뒤에서 중얼거렸다. "그래 나도 보기 힘든 태극기를 넌들 쉽게 보았겠느냐" 살며시 울화통이 치밀었다.

미국내 한인동포를 대표한다는 단체가 무려 842개. LA지역만도 187개로 세계 동포사회중 최다라고 들었다. 사심 없는 모임이라면 많을수록 좋다. 차제에 이 많은 단체에게 호소하고 싶은 바는 특별히 많은 예산이 들지 않는 태극기 스티커 정도 마련해 배포해 줄 수는 없는지 하는 점이다. 공무에 여념이 없겠지만 영사관 문턱에 비치해주면 오가며 손쉽게 구할 수 있으리라 본다. 2002년 월드컵 스티커도 같이 비치해 두면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어렵게 표현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 보자고 제언하고 싶다. 태극기 스티커 물결 속에서 코끝이 찡하고 달아오르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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