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워싱턴에서 만난 사람

2001-04-13 (금)
크게 작게

▶ 뉴스에세이

▶ 이정인(국제부 부장대우)

얼마 전 친지 방문차 워싱턴 DC에 갔다가 한 50대 한인 엄마와 30대 아들을 만났다. 그녀는 국제결혼을 한 후 미국에 와서 세 아들을 낳고 애리조나주, 텍사스주 등을 거쳐 약 10년 전에 이 곳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의 아들들은 당연히 혼혈이다. 놀란 것은 이들의 한국말이 유창할 뿐 아니라 대학을 나와 주류사회에서 직장을 잡고 결혼까지 했으면서도 부모 곁을 맴도는 것이었다. 유난히 백인 모습인 큰아들은 "장남으로서 당연히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며 3대가 같이 산다.

일요일이면 딸과 함께 미국 교회에 갔다가 오후에는 엄마가 다니는 한인교회에 나와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이다. 교회나 한인사회에서 갈비를 굽고 김치를 담가 파는 등의 행사나 바자가 있으면 언제나 손을 걷어붙이고 막일에 뛰어드는 바람에 유난히 눈에 띈다.


월급도 모두 엄마에게 바치고 아내와 두 딸이 함께 쓰는 생활비를 타서 쓴다. 그렇다고 엄마 치마폭에 휘감겨 정신적 독립을 못하는 마마보이도 아니다. 그는 당당한 주류사회의 엔지니어다.

주변에 사는 장성한 둘째와 셋째 아들도 수입의 일부는 독일에 근무하는 아버지 생활비로 보내고 대부분은 엄마에게 보낸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엄마 집에 모여들어 순 한국식 음식을 왁자하게 먹고 아직도 호랑이인 엄마한테 야단도 맞고 돌아간다. 그러고도 도대체 불평이 없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다같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사극 드라마나 전원일기에서나 보이는 전통적 가부장(아버지대신 어머니가 주도하지만) 제도가 미국에서, 그것도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의 그녀 집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이민 후 자녀들을 미국사회에 제대로 적응시키는 목표만을 가지고 뛰어왔던 많은 한인 부모들은 이들 모자를 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한국인인데 한국말을 못하고 음식과 문화도 미국식인 영어만 유창한 성공한(?) 자녀를 가진 엄마들도 그녀를 대놓고 부러워한다.

"도대체 어떻게 교육을 시켰느냐"는 질문은 가는 곳마다 받고 있다. "우리 얘는 대학생이 된 후부터는 코빼기 보기도 어려운데… 한국말이 서투르니 점차 대화도 끊기고 게다가 결혼하고서는 더욱 뿔뿔이 흩어져서 아예 남같이 살고 있는데… 어렵더라도 한국말을 끝까지 가르칠 걸"이 이들의 푸념이다.

그래선지 겉모습은 미국인인데 한국말과 한국음식, 한국문화나 전통에 거침이 없고 한인사회의 일원처럼 잘 어울리는 이들에게 자녀가 떠나버린 빈 둥지 노부모들의 사랑이 쏟아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을 키운 엄마에게도 칭찬이 모아지고 있다.

미국인 남편과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말을 결사적으로 가르칠 생각을 어찌 했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것만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내 자신과 부모형제를 탈피시키기 위해 국제결혼까지 택한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었다"고 했다.


영어와 미국문화는 저절로 터득할 것이고 자녀에게 만약 한국어나 경로사상, 한국문화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영어가 제대로 안되어 절대로 미국인이 될 수 없는 자신은 결국 이 곳에서 외톨이가 될 것이 뻔했다는 것이다. 또 한국인 피가 반 이상 섞였으니 미국이나 영어를 아는 만큼 한국과 한국말도 알아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교육법이 따로 없었다. 그가 붙든 것은 무조건 집에서는 한국말로 엄마와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자신이 어렸을 때 듣고 살았던 부모나 어른은 무조건 공경하라는 내용을 젖먹일 때부터 세뇌(?)시키는 것이었다. 옳지 않은 데도 내 아이니까, 혹은 귀찮거나 떼를 쓰니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직선적인 그녀의 성격이 용납하지 않았다.

한국말을 시키느라 호랑이가 되어 무서운 체벌도 가했다. "아이 죽이겠다. 무슨 엄마가 그렇게 무식하게 아이들을 닦달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하던 남편도 세 아들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정말 예의 바르고 착하다. 아들 잘 키웠다"는 칭찬을 받자 우악스런 길들이기 편에 섰다고 한다.

세 아들이 초등학교부터는 한인들을 위해 통역 역할도 하고 미국사회에 한인사회를 연결시켜 주는 징검다리가 되면서 그녀의 위치는 집에서 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격상되기 시작했다. 언제나 편하게 한국말로 대할 수 있는 세 아들은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즐거움으로 바꿔줬다.

어린 시절 의붓아버지와 재혼한 모친에게 딸려 간 천덕꾸러기 딸이었던 그녀에게는 상상도 못했던 자신감과 성취감이 생겼다. 그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부모님과 형제 자매 등 친지를 무려 50명 이상 미국으로 끌어들여 살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줬다.

이번 워싱턴 DC 여행은 특별한 이들 모자와의 만남 때문에 벚꽃 만개 시기를 놓쳤어도 섭섭지 않았다. 겉으로는 평범한 중년 한인일 뿐이지만 그는 효녀 심청이었고 맹자 어머니였다. 조국과 한국인임을 진정 자랑스러워하는 애국자이며 훌륭한 한국어 교육자로 보였다.

LA지역에서 한때는 엄청난 붐을 일으켰던 주말 한국학교 등 한국어 교육기관에 등록인원이 현재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걱정스럽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