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풀죽은 50대

2001-04-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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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 칼럼

서울에서 누구와 약속할라치면 보통 호텔 커피숍을 만나는 장소로 정한다. 그런데 커피값이 만만치 않다. A급 호텔은 한잔에 1만원이고 B급 호텔은 7천원이다. 직장에서 밀려난 친구가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해 나갔으나 커피 한잔에 1만원이라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려 한마디 했다.

"아니 왜 이렇게 값이 비싼 호텔 커피숍에서 사람을 만나야 하지? 시내에 일반 커피숍도 많을텐데..." 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손을 젓는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서 보면 나이먹은 사람들이 왜 울며 겨자먹기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는지 이해할 것이라고 했다.

시내 커피숍을 몇 군데 들여다 보았더니 도저히 나이먹은 사람이 가서 앉아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10대와 20대 청소년들로 바글거렸다. 미국에서는 TGIF나 스타박스 같은 곳에서 장년층이 커피를 마실만한 분위기인데 서울의 TGIF 식당이나 스타박스 커피숍은 학생들로 메워진다. 옛날에는 명동도 어른들 만나는 곳이 대부분이고 학생들은 뉴욕 빵집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지금은 어딜가나 10대와 20대를 위한 곳이고 오히려 어른들의 만남의 장소가 재한되어 있다.


맥주홀마저 50대~60대가 가기에는 어색하다. 을지로 입구 네거리 생맥주로 유명한 OB 호프가 있는데 6백명 좌석이 항상 만원일 정도다. 이곳에도 대부분 20대 남녀들이고 40대도 보기 드물다. 우리 같은 사람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다. 어디를 가서 앉아도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도대체 50대와 60대 사람들은 어디에 모여 있나.

물론 골프장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주말에 골프친다는 것은 예약하기 힘들고 돈들어 극히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나이먹은 사람들은 무얼하고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누가 산에 가보라고 일러준다.

등산준비를 갖추어 주말에 청계산에 갔다. ‘옛골’이라고 쓰여진 버스종점에 내렸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 넓은 버스종점 빈터를 1천여명의 등산객이 꽉 메우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50대와 60대였다.

노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젊은이도 아닌 장년층이었다. 함께 간 일행의 설명에 의하면 IMF 이후 등산객이 부쩍 늘었으며 요즘은 실직자들에게 무얼하고 지내느냐고 물으면 "마운틴 닷 캄 회사에 나간다"고 대답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그날 하루 청계산은 온통 이 ‘어른’들로 메워졌다. 이상한 것은 옛날에는 학생들이 등산을 많이 하고 노인들은 없었는데 지금은 산이 노인총회 하는 곳처럼 변해 버렸고 젊은이는 눈을 비비고 봐도 없다. 도시와 산의 연령분포가 과거와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 있다.

다이어트 하기위해 밥 굶는 것과 쌀 떨어져 밥 굶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취미로 등산하는 것과 실직자가 되어 등산하는 것은 자세부터가 다르다. 실직자에게 있어 등산은 자기와의 대화시간이고 누구를 만나는 것도 기피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서 등산여행을 떠나는 클럽을 따라다닌다.

IMF의 최대 피해자는 50대다. 50대는 명예퇴직과 조기퇴직 등 구조조종의 1순위에 있으며 최근에는 이 연령의 실업자 수가 지난 해 보다 56.4%나 더 늘어났다.


인생은 2모작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에 50대에 은퇴해도 30년은 더 살아야 한다. 구조조정된 이들이 앞으로 30년동안 등산만 하면서 세월을 보내야 할 것인가. 50대의 인력활용은 새로은 한국의 숙제로 떠오르고 있다. 자기가 맡은 역이 끝나면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는것이 연극의 순리다. 자신이 맡고 있는 역을 끝내지 않았는데도 누가 퇴장을 명령한다면 그 인격적인 모멸감은 보통이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활기찬 20대 문화,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풀죽은 50대 문화-이것이 요즘의 서울이다.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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